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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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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팬지 그리고 로또

등록 2006-08-04 00:00 수정 2020-05-03 04:24

▣ 이계삼 밀양 밀성고 교사

나는 지난 얼마 동안 팔레스타인, 레바논 사태를 보도하는 기사들을 슬쩍 외면하는 기분으로 지나치고 있었다. 똑바로 바라보기가 겁났다고 하는 게 솔직한 표현일 것 같다. 그 처참한 사태를 마음으로 느낀들 내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나는 ‘무력감’이 싫었고, 그 슬픔의 연쇄를 더듬어 내 삶의 현재와 연관시키는 일도 두려웠다.

그러다가 어느 인터넷 신문에서 팔레스타인 작가 키파 파니의 에세이 ‘우산에 대한 다른 생각’을 읽었다. 나는 긴 탄식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무언가, 마음 깊은 곳이 아파왔다.

내가 작가를 기다리는 이유

팔레스타인 작가 키파 파니, 그는 함께 술 마시며 토론하던 친구를 다음날 벽보에서 ‘순교자의 사진’으로 만난다. 이스라엘 특수부대 암살단은 순식간에 팔레스타인 작가를 죽여버린다. 그래서 그들의 만남의 인사는 ‘살아 있음의 반가움’으로 넘쳐난다.

비가 귀한 땅에 살아서인지 그는 비를 무척 사랑하는 듯하다. 그는 우산 없이 비를 맞는다. 그는 볼에 와 닿는 빗방울의 감촉에서 어머니의 탯줄로부터 떼내어진 이별의 아픔을, 지금 살아 있음을, 그리고 이미 죽어 없어진 친구를 느낀다. 우산은 하나의 물건이지만, 팔레스타인 작가인 그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드리운 휘장 같은 것이다. 그 글을 읽으며 나는 빗속을 우산 없이 천천히 거니는 어느 아랍 청년을 떠올렸다. 우산, 이 음울하고도 슬픈 상징이 팔레스타인과 나 사이에 드리운 아득한 시공간을 뚫어버렸다.

한때 나에게도 그 숱한 언론 매체를 낱낱이 훑어내던 시절이 있었다. 욕구인지 편집증인지 모를 충동이었지만, ‘세상 공부’라 생각하며 자위했다. 그러나 그 많은 ‘팩트’들은 대개 이 세상에 넘쳐나는 야만, 맹목, 어두움이었다. 이 팩트들은 다른 말로 ‘돈’이었고, 이 시대 인간들의 궁핍한 욕망이었다. 이 욕망의 계단을 아무리 밟아 올라간들 그 위에는 텅 빈 하늘밖에 없었고, 아무리 샅샅이 살핀들 우리가 이 희망 없는 세계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그래서 나는 작가를 기다린다. 나는 문학의 힘에 혹은 상상력에 기대고 싶다. 세상일이 막막할 때 나는 때때로 백석의 시집을 꺼내 그 아름다운 모국어로 펼쳐놓은 전근대(혹은 반근대)의 삶을 꿈결처럼 그리워한다. 이제 시시각각 다가오는 평택 대추리·도두리의 강제철거를 생각하다가 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행복동의 영희가 머리에 팬지꽃을 꽂고 줄 끊어진 기타를 치던 집, ‘500년 걸려 지은’ 그 집이 허물어질 때 부서진 대문에 엎드려 잠든 오빠 영호의 꿈속에서 영희가 시커먼 폐수 속으로 노란 팬지꽃을 던져 넣던 그 충격적인 판타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제 2006년 이 시점에서 한국 문학은 실로 하찮기 짝이 없는 존재가 돼버린 느낌이다. 문학 바깥에서 다리품을 팔며 행동으로 분투하는 작가들이 더러 있음을 모르지 않으나, 고통에 참여하고 그 너머를 그리려는 몸부림은 매우 귀한 것이 되었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 참석했다가 지난해 말 발간된 한 여류 시인의 시집 이야기를 들었다. 돼지, 진주 어쩌고 하면서 자신과 사적으로 얽힌 지식인들을 빗대어 비판한 시들이 숱한 소문을 만들었고 시집이 꽤 팔렸다는 이야기다. 서점에 들렀다가 그 시집을 발견하고 선 자리에서 몇 편을 읽었다.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그 시집 뒤표지에는 문단의 원로 시인이 ‘할 말은 하는 용기’(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를 크게 칭찬하고 있었고, 좀 이어 이 시집이 무슨 대기업이 제정한 문학상을 탔다는 소식도 들었다. 나로선 퇴폐의 끝장을 보는 느낌이었다.

문단, 개평을 받아 쓰는가

문학에 대한 내 기대가 과도하기 때문에 이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난해 정부가 로또 판매기금에서 52억원을 떼내 우리 문단을 지원했다 한다. 일이 참 서글픈 모양새로 꼬여간다 싶다. 우리 문학이 그야말로 ‘개평’을 받아 쓰는 처지가 된 것이다.

세태 탓을 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이런 것도 알아주었으면 한다. 나처럼 문학에 대해 ‘바라는 바가 많은’ 사람들, 인간의 위엄과 세상의 아픔을 그리는 것은 다름 아닌 작가의 몫이라고 믿는 사람들, 그야말로 ‘순진한’ 문학 애호가들이 우리 문학에 대한 기대를 이제 완전히 접고 서서히 떠나가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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