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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성금 삥땅 사건

등록 2006-03-30 00:00 수정 2020-05-03 04:24

동아일보 성금 삥땅 사건

“광주항쟁이 먼저인가요, 6월항쟁이 먼저인가요?”

아주 천진난만한(!) 질문입니다. 요즘 실제로 그렇게 묻는 대학 새내기들이 있다고 합니다. 한 대학 교수가 그 이야기를 듣고 “확 깼다”면서 전해주더군요. 30, 40대 이상이라면 세대차이를 실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6월항쟁은 벌써 19년 전 일입니다. 광주항쟁은 26년이나 지났습니다. 1987년쯤 태어난 대학 새내기들이 충분히 혼동할 수 있는 일이지요. 제 경우를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저는 1985년에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입학과 함께 한 동아리에 가담했는데, 선배들이 훈련을 한답시고 이런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에 대해서 알아올 것.” 백지광고? 당시로선 불과 10년 전의 일이었는데, 무식했던지라 아무런 단서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서울 세종로 동아일보사를 직접 찾아가서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2006년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은 더 생소할 겁니다. 무려 31년 전의 일입니다. 그 사건은 한국 언론자유투쟁의 상징이었습니다. 지금도 동아일보사 신문박물관 3층엔 당시 백지광고 신문이 전시돼 있습니다. 동아일보사도 그 사건의 가치를 폄하할 수 없나 봅니다.

백지광고 사건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기자·PD·아나운서들이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하고 유신정권에 맞서겠다는 언론자유실천선언을 합니다. 이런 움직임이 언론계로 퍼지자 하루아침에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기업 광고가 끊깁니다. 백지가 돼버린 광고면을 독자들이 자발적인 격려광고로 채웁니다. 위기를 느낀 동아일보 사주는 기자들을 해직하고, 마지막까지 항의농성을 벌이던 이들을 폭력배를 동원해 쫓아냅니다. 이때 134명이 잘렸습니다. 그날이 1975년 3월17일입니다.

2006년 3월17일부터 동아일보사 앞 거리에선 그때 그 기자들이 동아투위의 이름으로 다시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천막을 치고, 10여 명이 날마다 돌아가며 현장을 지킵니다. 대부분 환갑을 넘긴 이들이지요. 31년 전 일을 재론하며 가타부타 따지는 일은 구질구질하면서 서글픈 일이지만, 피해자 입장에선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정부의 사과와 동아일보사 사주의 사죄, 정당한 배상을 요구합니다. 가능할까요?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동아일보사 사주에게 쉬운 것부터 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격려성금 돌리도!” 1975년 1~3월 세 달간 9543건의 격려광고 성금이 들어왔고, 그 액수는 무려 1억915만원이었다고 합니다. 언론자유 투쟁하던 기자들을 내쫓고도 그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삥땅인 셈이지요. 동아투위는 4월1일까지 농성을 합니다. 그날은 동아일보 창간 기념일입니다. 동아투위는 제안합니다. “당시 격려성금 내셨던 분들, 동아일보사 앞마당에서 한번 봅시다.” 약속시간은 2006년 4월1일 오후 5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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