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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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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일만’을 위하여

등록 2006-03-10 00:00 수정 2020-05-03 04:24

“이십일만!”
한때 그런 구호가 있었습니다. <한겨레21>의 다부진 목표였습니다. ‘5개년 계획’ 같은 로드맵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툭하면 “이십일만”을 외쳤습니다. 술자리에서 과격한 폭탄주를 돌리면서도 한결같이 “이십일만”이었습니다. <한겨레21>을 21만 부 찍고 싶다는 열망의 표현이었습니다. 창간 시절의 풍경입니다.
“시장의 판도를 바꿨습니다.” 1994년 9월, 창간하고 6개월이 흐른 뒤였을 겁니다. <한겨레21>은 신문광고에 이렇게 자신만만한 카피를 썼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서점과 가판에서 1등 먹었다”는 거였습니다. 그건 사실이었습니다. 기득권 매체들은 <한겨레21>을 우습게 봤는지 모르지만, <한겨레21>이야말로 그들을 만만히 여겼습니다. 시사주간지 출신 한 명 없이 창간팀을 꾸렸으면서도 턱없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창간호가 뿌려지자마자 시장 구도를 확 뒤엎었습니다. 아직까지도 그 21만 부의 판타지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창간하던 해에 나온 <한겨레21>을 뒤적이다 보면 눈이 번쩍 뜨입니다. 그만큼 글과 기획이 펄떡펄떡 살아서 뜁니다. 맹렬한 긴장과 창조적 투지가 손에 잡힐 듯합니다. 창간 멤버의 한 사람으로서, 저 역시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지만 차분히 돌이켜보면 창간팀의 치명적인 콤플렉스를 발견합니다. 그건 바로 여기자의 전멸입니다. 모조리 남자였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눈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기사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일부 기사에 대해 “반여성적인 거 아니냐”는 여성 독자들의 항의를 이따금 받았던 건, 그런 원초적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이번호 표지이야기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그 시대에 대한 통렬한 자기비판인지도 모릅니다.

<한겨레21>이 600호를 맞이했습니다. 시사주간지는 보통 한 해에 50권씩 발행됩니다. 설과 한가위 연휴에 한 번씩 쉬면 그렇게 됩니다. 600호는 정확히 12돌 생일에 돌아오는 셈입니다. 이 역사적인 기념일을 맞아 독자 여러분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겠습니다, 따위의 결의는 하지 않겠습니다. 더욱 정치적으로 올바른 잡지를 만들겠습니다, 라는 식의 다짐도 하기 싫습니다. 굳이 자축의 변을 하라면 이런 말을 늘어놓고 싶습니다. ‘선정성’과 ‘진정성’이라는 양날의 칼을 잃지 않겠노라고…. 선정성과 진정성은 어찌 보면 모순되는 존재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의 충돌과 조화 속에서 <한겨레21>만의 매력을 발산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아무튼 생일을 맞아 새 단장을 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디자인의 변화입니다. 더 예쁜 잡지, 사진을 더 파격적으로 쓰는 잡지가 되려 합니다. 독자 여러분이 비주얼을 감상하는 맛을 느끼도록 애써보겠습니다. 칼럼과 연재물들은 크게 흔들지 않았습니다. 경제와 문화면에 작은 칼럼들이 새로 생기거나 교체됐습니다. 김수현 기자가 2주에 한번씩 ‘음악실력’을 뽐내고, 김보협 기자는 ‘도전인터뷰’의 바통을 이어받습니다. ‘안병수의 바르게 먹자’와 의사들의 릴레이칼럼 ‘잊을 수 없는 환자’가 번갈아 실립니다. 박노자 교수의 연재물은 ‘동아시아 남녀’로 간판을 교체합니다.

꼭 생일이 아니어도, 시도 때도 없이 진화하겠습니다. 재미있을 때까지 바꿔가겠습니다. 열두 살을 맞아 다시 한번 외쳐봅니다. 이십일만!!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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