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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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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와 짝사랑

등록 2005-12-23 00:00 수정 2020-05-03 04:24

▣ 고경태/ 한겨레21 편집장 k21@hani.co.kr

속아도 신나는 12월입니다.
거짓말은 당당합니다. 곧 산타 할아버지는 루돌프 사슴과 함께 썰매를 끌고 옵니다. 선물꾸러미를 메고 옵니다. 착한 아이들만 선물을 받습니다.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 트리 전구 불빛에 벌써 가슴은 풍선이 됩니다. 다섯 살 먹은 제 딸은 산타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습니다. 간혹 진실을 흘려줘도 통하지 않습니다. 꿈을 깨주려 했다간 오히려 거짓말쟁이로 몰립니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파견된 산타 할아버지를 더 신뢰합니다. 실제로는 엄마가 선물을 사서 유치원에 보낸다는 것, 산타로 위장한 이벤트 회사 직원이 그 선물을 대신 전하러 온다는 사실 따위를 알 리 없습니다. 그저 선물이 뿌듯할 뿐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산타를 노래 부릅니다.

황우석 교수는 산타를 닮았습니다. 그의 선물보따리를 목놓아 기다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선물의 대의를 위해 난자 기증 대열에 동참한 여성들의 진정성과 선의를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머리맡에 양말을 놓은 것보다 1천 배는 절박한 심정으로 선물을 기다려온 난치병 환자들의 마음을 누가 철없다 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들은 동심을 가꿔야 할 어린이가 아닙니다. 속아도 신나는 꼬마들이 아닙니다. 2005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드디어 ‘황우석 산타’는 존재의 진실을 폭로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정색을 하며 “산타는 진짜”라고 우깁니다. 선물을 만들어줄 기술이 있다면서 말입니다. ‘진위 논란’에 처한 산타로 인해 올해 크리스마스는 악몽입니다.

지난 한 주, <한겨레21>도 악몽이었습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표지이야기를 정하느라 이렇게 헤맨 건 올해 처음인 듯합니다. 애초에 황우석을 표지로 잡았지만, 월요일인 12월12일 아침 그가 서울대의 줄기세포 공개 검증에 응하면서 난처해졌습니다. 당분간 조사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공백 상황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급박하게 표지를 다른 것으로 바꿨지만, 이 역시 12월15일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이 터뜨린 핵폭탄으로 다시 뒤집어졌습니다. 덕분에 20쪽이 넘는 표지이야기 기사를 하루 만에 만들어야 했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이것도 하늘에 있는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이 심심해지려고 할 때마다 다이내믹한 논란거리를 하나씩 떨어뜨려준 겁니다. 1년에 한 번씩! 2004년이 탄핵이었다면, 2005년엔 줄기세포인가요.

만약 마감날 노성일 이사장에 의한 반전이 없었다면, <한겨레21>의 표지이야기는 ‘짝사랑’으로 나갔을 겁니다. 2005년을 돌아보며 올해의 대표 단어를 ‘짝사랑’으로 정해보았기 때문입니다. 독도나 황우석에 대한 네티즌의 짝사랑, 삼성에 대한 검찰의 짝사랑, 박근혜에 대한 노무현의 ‘연정’ 짝사랑….

짝사랑은 애국주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황우석 교수에 대한 네티즌의 과도한 짝사랑이 물거품이 됐듯, <한겨레21>의 ‘짝사랑’ 기획은 피어나지도 못한 채 스러지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며칠 남지 않은 2005년, 부적절한 사랑은 정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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