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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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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단체

등록 2005-03-16 00:00 수정 2020-05-03 04:24

▣ 배경록/ 한겨레21 편집장 peace@hani.co.kr


지난 3월5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명예의장인 송암 신창균 선생이 98살을 일기로 별세했다. 신문의 한 귀퉁이에 쓸쓸하게 처박혀 있는 고인의 부음 기사를 접하면서 부끄러움이 앞섰던 것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때문이다. 드물게 고인은 일제치하에서의 독립운동에 이어 분단 이후에는 통일 및 민주화 운동에 한평생을 바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30대 초반에 중국으로 망명해 사업가로 성공한 뒤 임시정부의 자금책으로 활동한 일에서부터 1948년 4월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남북연석회의에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참가해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과 회담한 일화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의 산증인이 바로 그다. 이어 그는 이승만 정권에서는 백범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는 혁신계 인사라는 이유로, 80년대와 90년대에는 ‘이적단체’로 규정된 범민련 활동을 이유로 40여년 동안 정치적 탄압을 받아야 했고 여러 차례 옥고를 치러야 했다.

고인을 처음 만난 것이 80년대 후반이었으니까 이미 그는 70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통일 및 민주화 운동 진영의 기자회견장이나 집회·시위 현장에서 늘 그를 만날 수 있었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는 그를 지켜보면서 나이를 의심하기도 했다. 통일운동가와 기자 사이의 딱딱한 관계를 허물게 된 것은 90년대 중반 경기도 과천의 고인 자택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흐트러지지 않은 단정한 용모와 검소한 옷차림, 항상 옆구리에 끼고 있던 빛 바랜 누런 서류봉투, 저녁 무렵 지하철에서 만나 집까지 걸어가며 이런저런 힘든 세상일에 대해 따뜻하게 위로의 말을 건네던 자상함에서 추상 같던 노(老)운동가는 다정한 동네 어르신으로 다가왔다.

통일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열정이 건강비결이라고 얘기하던 그도 거침없는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이제 그는 갔다. 그러나 그는 편안하게 가질 못했다. 고인이 된 문익환 목사와 작곡가 윤이상 등과 함께 창립해 그가 마지막까지 몸담았던 범민련이 이적단체라는 멍에를 벗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이적단체로 규정된 뒤 정권이 두번 바뀌고 6·15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으며 국가보안법 폐지가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범민련은 아직도 이적단체로 낙인찍혀 있다.

얼마 전 좌파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훈포장을 수여하는 등 정부가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고인에 대해서는 훈포장 추서는 고사하고 빈소에 그 흔한 조화조차 보내지 않았다.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과 장영달 의원이 개인적인 친분으로 조화를 보냈을 뿐, 노무현 대통령과 이해찬 국무총리,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소식을 접하고도 외면했다. 이적단체의 명예의장이란 점이 그들을 불편하게 했을 것이라고 조문객들은 한마디씩 내뱉었다. 정부의 옹졸한 처사에 분노하는 조문객들도 적지 않았다.

현행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의 법통’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음을 명문화하고 있다. 임시정부 시절의 고인 행적만으로도 그에 걸맞은 예우를 하는 게 도리일 것이다. 그가 2004년 4월 <한겨레21>(505호)과 한 인터뷰가 결국 언론과의 마지막 인터뷰가 되고 말았다. “앞으로 어떤 희생과 탄압이 따르더라도, 그리고 죽음을 감수해서라도 남은 생애를 국가와 민족의 소망인 통일운동에 몸 바치고자 합니다. 지금 수구세력들은 노무현 대통령도 빨갱이로 몰고 있어요. 이런 기가 막힐 일이 어디 있어요.” 이제 노 대통령이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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