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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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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등록 2004-11-05 00:00 수정 2020-05-03 04:23

▣ 배경록/ 한겨레21 편집장 peace@hani.co.kr

오랜만에 글을 보내는 것 같구나. 올해 고교생이 된 너도, 늘 회사 일에 바쁜 아빠도 서로 무관심하게 지낸 탓일 게다. 이렇게 오랜만에 펜을 든 것은 며칠 전 잠깐의 대화에서 네가 예기치 않은 일로 학교 생활이 힘들다고 푸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친구들이 고교등급제 폐지를 올곧게 주장한 의 논조에 대해 이런저런 불만을 표시하는 얘기를 자주 듣는 것이었다고 하니, 아빠로서는 너무나 당황스러워 이렇게 몇자 적고 싶어졌단다. 부모가 몸담고 있는 일터가 비난의 대상으로 친구들 입길에 오르내린다면 어떤 딸인들 마음이 편할 리 있겠냐 싶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입 수시전형에서 네가 다니는 학교의 선배들이 혜택을 받은 것이 사실로 드러났고, 이제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친구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으니 너무 마음 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고교등급제 파문 이후 헌법재판소의 행정수도 이전 위헌 판결, 정치권의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 등을 지켜본 친구들이 마치 분풀이하듯 현 정부와 여권의 정책에 불만을 표시하는 것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학교 공부에 내몰리고 있는 너희들이 난마처럼 얽힌 국가적 현안들의 본질이 무엇인지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으며, 무엇을 근거로 어떤 판단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하는 얘기일 테니까.

이번 일을 겪으면서 여러 가지 착잡한 상념에 사로잡히게 되는구나. 친구들과 네가 서로 불편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든 게 어른들 탓이지, 너희들의 잘못만은 아닐 게다. 그동안 한국 사회가 좌와 우, 진보와 보수, 동과 서, 남과 여, 연륜과 패기, 부와 가난, 1등과 꼴찌로 나뉘어 몸살을 앓고 있는 현장을 지켜본 너희들로서는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며칠째 여의도에서 들려오는 ‘파행’이라는 단어에도 익숙해져버린 너희들 아니냐. 지난날의 아픔을 씻고 미래를 얘기하는 사회, 화해하고 화합하는 사회, 서로 껴안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지 못한 책임을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뼈저리게 느끼게 됐단다.

친구들과 셰익스피어와 베토벤, 비틀스를 얘기하던 아빠의 고교 시절도 떠올려보았단다. 당시에도 박정희 정권의 유신정치가 시작됐고 그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씨가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테러리스트의 총격을 받아 숨지는 등 요즘 못지않은 메가톤급 사건도 많았지만 교실 안에서는 적어도 그런 얘기가 발붙이지 못했던 것 같다. 늘 대입이라는 각박한 현실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친구들과 많은 낭만과 추억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그 시절과 지금이 많이 다른 이유는 역시 대학입시에서 찾아야 할 것 같구나. 논술과 면접에서 다양한 시사 문제가 출제되다 보니 요즘 고교생들이 여러 사회 현상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겠지. 너희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라도 학교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이 특정 사회 문제에 대해 좀더 정확하게 전말을 알려주고 토론을 통해 올바른 가치관을 길러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대입 수학능력시험이 오는 17일로 다가온 것을 보니 이제 본격적인 입시철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다른 것은 몰라도 너와 친구들이 고교등급제 파문을 겪고 난 뒤 무척이나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꼈을 다른 학교의 친구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부터라도 너희들이 반목하지 않는 세상이 열리기를 꿈꾸며 이만 줄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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