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밤나무와 너도밤나무는 실제로 우리 땅에 사는 나무 이름이다. 한 식물의 이름을 새롭게 정해야 할 때 식물학자들은 접두어 ‘나도’와 ‘너도’를 종종 갖다 붙였다. 기존에 이름이 있던 식물과 생김새가 닮았거나 혈통이 같은 경우에 그랬다. 나도바람꽃과 너도바람꽃, 나도개미자리와 너도개미자리, 나도양지꽃과 너도양지꽃도 각각 바람꽃과 개미자리와 양지꽃에서 파생한 이름이다.
나도밤나무는 국내 남부지방의 숲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나무다. 밤나무와는 전혀 다른 혈통인데, 잎을 보면 왜 그 이름이 붙었는지 이해가 확 간다. 잎이 밤나무를 무척 닮았기 때문이다. 다만 잎만 밤나무를 닮았다. 초여름에 피는 꽃은 이팝나무와 아까시나무를 섞어놓은 듯 보얗고 화사하다. 열매는 똥글똥글 붉게 가을에 익는데 정원이나 공원에 즐겨 심는 남천을 떠올리게 한다.
너도밤나무는 밤나무와 같은 혈통의 참나뭇과 식물이다. 여느 참나무류처럼 단단하고 굳은 열매를 맺는데 그 모양은 도토리처럼 둥글지 않고 세모 형태다. 국내에서 너도밤나무는 오직 울릉도에만 산다. 19세기 말 울릉도에 도착한 이주민들이 울릉도에 오기 전부터 알던 육지의 밤나무와 나도밤나무로부터 구별하기 위해 그래 너도, 하고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너도’로 시작하는 따뜻한 어조의 말은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나와 너를 결속해 하나로 묶어주는, 어딘가에 연결돼 있으니 외롭지 말라는, 거기가 어디든 힘내서 발붙이고 살라는, 누군가의 존재를 지탱하게 해주는 힘을 지닌 그런 말.
아주 먼 과거에 너도밤나무는 한반도 내륙에도 살았다. 약 2천만 년 전 동해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경북 포항시 동해면 금동리 산지에는 너도밤나무가 화석으로 많이 발견된다. 너도밤나무뿐만 아니라 중국 원산의 메타세쿼이아 화석도 나온다. 국가유산청은 ‘포항 금광동층 신생대 화석산지'를 2023년 말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약 60종의 식물화석이 발견된 그 땅이 신생대 전기 한반도의 지형과 기후환경, 식생 변화 등을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너도밤나무는 신생대 속씨식물의 번성과 쇠퇴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 단서가 된다. 너도밤나무속(Fagus) 식물은 신생대 제3기 동안 북반구 대륙에 번성했다. 신생대 제4기 빙하기를 통과하며 식물은 좀더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온화해지는 시기에 북쪽으로 영역을 확장하기를 반복했다. 기후위기에 맞서 끊임없이 이동한 너도밤나무는 현재 전세계에 10여 종이 북부 온대림의 우점종으로 살아간다. 어떤 너도밤나무에는 어느 지역이 피난처가 되기도 했는데, 대만의 ‘대만너도밤나무’가 그 경우다. 중국 내륙의 아열대 산지에 드문드문 나타나다가 드넓은 육지를 건너뛰고 뜬금없이 바다 건너 대만에서 우르르 자라는 대만너도밤나무를 학자들은 기후위기에 적응해 나무가 한 곳을 피난처로 삼고 군집을 키운 대표적 사례로 든다.
울릉도에 사는 우리 너도밤나무는 아직 미스터리다. 어떤 학자는 울릉도의 너도밤나무가 대만너도밤나무와 같은 경우로, 울릉도를 피난처로 삼았을 뿐 중국 동부지방에 사는 너도밤나무와 같은 종이라 한다. 중국 동부지방에서부터 이어져 한반도 내륙 전체에 번성했다가 쇠퇴하기를 반복했는데, 한반도 다른 곳에서는 자취를 감췄으나 울릉도만큼은 살 만해 안식처 삼아 눌러앉은 것이라고. 또 어떤 학자는 중국 쪽이 아니라 일본의 너도밤나무와 더 가까운 혈통이라고도 한다. 그 둘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니 아예 울릉도만의 고유종으로 봐야 한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아주 먼 과거에는 한국과 일본과 중국의 너도밤나무가 다 하나이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종과 종의 경계를 재단하는 분류학은 고정불변한 진리가 아니라 변화하는 자연에 맞서 유한한 인간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가설을 진리 가까이 이끄는 계속되는 노력이다.
너도밤나무의 분포와 식생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나는 울릉도 너도밤나무숲에 들어가서야 그러한 근심을 잊게 된다. 내가 대학원 석사과정을 밟았던 식물분류학 연구실은 울릉도와 독도의 식물을 대상으로 섬 식물의 진화를 탐구하는 곳이었다. 10여 년 전 얼마간은 그래서 울릉도의 그 무궁무진한 식물들이 내게 숙제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문제를 해결할 요량으로 때로 그 섬에 오래 머물기도 했다. 성인봉 9부 능선에는 너도밤나무가 이룩한 원시림이 있다. 1962년 천연기념물 제50호로 지정된 그 숲의 정식 명칭은 ‘울릉 태하동 솔송나무·섬잣나무·너도밤나무군락’. 그 깊은 숲에서는 어쩐지 집착이나 미련 따위를 가지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 축구장 25배 면적의 그 천연림 안에서도 너도밤나무는 특히 압도적이다.
이른 봄 너도밤나무 연둣빛 새순이 나올 때 그 숲에 가서 볕뉘(작은 틈으로 잠시 비치는 햇볕) 받으며 와-,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여름 녹음 짙을 때 그 숲의 나무 그늘에서는 우와-, 하고 소리를 질렀다. 너도밤나무가 황금빛으로 물드는 가을에는 그 단풍의 색감에 넋을 빼앗기곤 했다. 울릉도 너도밤나무숲은 세상의 번잡한 일 따위를 순식간에 잊게 하는 마력이 있다. 특히 사계절 내내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감동시키는 건 너도밤나무의 줄기와 뿌리다. 코끼리 다리의 질감과 색감을 닮은 그 회색빛 줄기와 시조새 발 모양으로 땅을 거머쥐고 지면에 노출된 그 뿌리는 웅장하다.
“너도밤나무만큼 아름다운 줄기와 멋진 발등을 가진 나무는 없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숫가를 거닐며 1851년 11월7일에 쓴 일기에는 내가 울릉도 너도밤나무를 보며 느낀 것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실제로 미국 사람들의 너도밤나무에 대한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숲을 건강하게 가꿔줄 뿐만 아니라 그 용모가 수려해 조경수로 쓰이고, 껍질에서부터 목재와 열매까지 아낌없이 나눠주는 쓰임새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자연주의자 존 버로스는 유럽에서 만난 너도밤나무를 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오랜 친구인 너도밤나무를 보고 기뻤다. 줄기는 고향에서 만난 것과 비슷했다. 소로가 봤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유럽 나무의 발등이 더 예쁘다고 했을 것이다. 대서양 이쪽에 있는 너도밤나무는 미국산 너도밤나무보다 더 매끄럽고 우아한 나무다.” 나무의 발등에 주목하는 사람들의 시각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유럽에서는 너도밤나무를 아예 숲의 어머니라 칭하기도 한다. 유럽너도밤나무가 왕성하게 군락을 이룬 숲은 유기물과 무기화합물이 풍부해 땅이 비옥해지고 토양 침식이나 범람으로부터 안전해 더 다양한 생명을 그 주변에 살게 한다. 열매는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동물의 식량 자원이 되고 꽃이나 잎에서 추출한 물질로 유럽 사람들은 화장품과 약을 만들기도 한다. 요즘 침구류 원단으로 국내에서도 인기가 있는 ‘모달’은 유럽너도밤나무 섬유질로 만든 인견이다.
독일은 유럽에서 유럽너도밤나무림 분포 지역의 중심에 있다. 유럽너도밤나무가 숲을 이루는 면적 중 약 25%가 독일령이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비교적 최근에 조성된 인공림이고, 200년에 가까운 유럽너도밤나무림은 독일 전체 면적의 0.26%에 불과하며, 인간의 간섭이 없었다면 독일 대부분 지역은 오래된 유럽너도밤나무림이었을 거라고 한다. 진정한 원시림에 가까운 유럽너도밤나무숲은 카르파티아산맥에만 남아 있으니 그곳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폴란드와 슬로바키아와 우크라이나 등 동부 유럽 몇 개국에 걸쳐 소소리 솟은 산맥 카르파티아. 그곳의 유럽너도밤나무 원시림을 유네스코가 나서서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한 건 2007년 7월의 일이다. 이에 발맞춰 유럽연합도 유럽 전역의 오래된 너도밤나무림을 추가로 보전하고 확산하는 데 앞장서겠다는 장기 프로젝트를 빠르게 마련했다.
그런데 지금, 그 너도밤나무숲들이 위험에 처했다. 최근 미국너도밤나무를 덮친 감염병이 유럽에서도 큰 문제가 되고 있어서다. 선충을 매개로 감염균을 옮겨 몇 년 안에 나무를 죽게 하는 치명적인 ‘너도밤나무잎병’이 미국을 혼란에 빠트린 지 몇 해가 흘렀다. 유럽너도밤나무에서도 그 피해가 보고되고 있다며, 유럽 학자들이 2022년 프랑스 앙티브에서 열린 제7회 국제선충학회에서 그 심각성을 논의했다.
유럽너도밤나무에 닥친 더 큰 공포는 감염병뿐만 아니라 현재 진행되는 전쟁이다. 유네스코로 지정된 카르파티아산맥 원시림의 핵심 지역에 해당하는 ‘동부 카르파티아 생물권 보호구역’은 우크라이나 최서단에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그 오래된 숲이 몇 해째 일반인에게 접근이 불가한 땅이 됐다. 보호구역 관광 수입으로 살아가던 주민들은 생계를 위협받고 있고, 숲에서 진행되던 다양한 보전 활동과 연구에 투자되던 비용은 전쟁 자금으로 허비되고 있다. 폴란드인의 후예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 산골 마을 주민의 인터뷰를 얼마 전에 읽었다. 전쟁으로 생활이 매우 어려워졌지만 오래된 너도밤나무숲을 보며 재난을 헤쳐 나가는 희망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1937년 나치스가 독일 바이마르 근교에 세운 강제수용소 부헨발트는 ‘너도밤나무’(부헨)+‘숲’(발트)이라는 뜻이다. 유럽너도밤나무숲이 지금도 그 일대에 우거져 있다. 28만 명에 이르는 수감자가 수용소를 거쳐갔고 적어도 5만6400여 명이 수용소 안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100년이 안 돼 그 비슷한 광경을 너도밤나무숲은 목도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아마도 나치스가 했던 것과 나란히 인간이 수치스러워해야 할 제노사이드로 기억될 것이다.
나에게 세상사를 잊게 해준 울릉도 너도밤나무숲은 지금의 어지러운 현실을 탄식하며 팔을 벌리고 이렇게 말할 것도 같다. 돌이킬 수 없는 참혹한 전쟁과 눈앞의 이익을 위한 무분별한 개발에 골몰하지 말고 자기 발등을 좀 내려다보라고. 자신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행위로 제 발등 찍는 일 좀 멈추라고도.
허태임 식물분류학자·<나의 초록목록> 저자
*연재 소개: 식물학자가 산과 들에서 식물을 통해 보고 듣고 받아 적은 익숙하지만 정작 제대로 몰랐던 우리 식물 이야기.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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