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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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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가문비나무의 깊은 울림

노르웨이·독일·북미·동아시아 현악기의 재료… ‘소빙하기’ 가문비는 대체불가 명품 ‘스트라디바리우스’로
등록 2024-06-14 20:12 수정 2024-06-21 11:10
가문비나무. 일러스트레이션 차지우(중1)

가문비나무. 일러스트레이션 차지우(중1)


악기가 되는 나무들이 있다. 그랜드피아노 한 대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가 들어간다. 향판은 울림이 좋은 가문비나무, 금속 현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부분은 너도밤나무, 다리는 튼튼한 참나무류, 흰건반과 검은건반은 결이 부드러운 목재 중에 색을 고려해서 각각 피나무와 흑단을 쓰는 편이다.

사색·명상·고요함의 숲

전세계적으로 30여 종의 가문비나무가 모여 가문비나무 속이라는 가계를 이룬다. 모두 북반구가 터전이다. 가문비나무의 분포를 알면 어떤 나무가 그 지방의 악기가 됐는가를 헤아릴 수 있다. 이를테면 노르웨이,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는 독일가문비나무가, 북미에서는 싯카가문비나무가, 동아시아에서는 가문비나무가 현악기의 재료가 됐다. 일본의 홋카이도와 러시아의 사할린, 쿠릴열도 등지에 사는 소수민족 아이누족은 주변에 널리 자라는 가문비나무로 집도 짓고 배도 만들고 현악기인 톤코리도 만들었다.

그 가문비나무가 한반도 이북에서는 왕성하게 살지만 비교적 남쪽 지방에 해당하는 국내에서는 근근이 살아간다. 몇 해 전에 나는 백두산 중국령에 가문비나무 자생지를 조사하러 갔다가 광활하게 펼쳐진 군락지 풍경에 압도됐다. 독일가문비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찬 노르웨이 숲에 온 것만 같은 착각도 들었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로 손꼽히는 트롤스티겐은 요정의 길이라는 뜻을 지닌 피오르 해안이다. 빙하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골짜기에 빙하가 없어진 뒤 바닷물이 들어와서 생긴 좁고 긴 만. 그곳에 독일가문비나무의 거대한 숲이 찬란하게 펼쳐진다. 임학자 임경빈 교수는 독일가문비나무는 노르웨이에서 봐야 실감이 난다고 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1961년 봄에 노르웨이를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오슬로시는 독일가문비나무 숲속에 싸여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나무들인가? 독일가문비나무는 종교적인 침묵과 사색과 명상 그리고 고요함을 담고 있다. 그러한 나무숲 안에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국내에서 만날 수 있는 독일가문비나무 숲. 전라북도 무주군 덕유산자연휴양림 내에 있다. 전라북도 제공

국내에서 만날 수 있는 독일가문비나무 숲. 전라북도 무주군 덕유산자연휴양림 내에 있다. 전라북도 제공


우리나라에서도 독일가문비나무 숲을 만날 수 있다. 덕유산자연휴양림 골짜기에는 독일가문비나무 150여 그루가 모여 사는 울창한 숲이 있다. 1931년에 심은 묘목이 커서 지금의 고목이 됐다. 나무둥치 지름이 80㎝가 넘고 높이는 30m에 이른다. 그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일제강점기를 통과하며 국내 곳곳에 독일가문비나무를 조경수로 심었기 때문에 청와대와 경희궁 등 서울 시내에도 고목이 산다.

하지만 국내에 자생하는 가문비나무의 상황은 애처롭다. 지금의 기후위기로 가문비나무는 전보다 살기 어려운 환경에 놓였으므로. 사람 손을 타지 않고 그들 스스로가 살 수 있는 곳은 계방산과 소백산, 덕유산, 지리산이 전부다. 그 네 곳에서도 쑥쑥 커가는 개체는 잘 안 보이고 쇠약해져 말라 죽어가는 개체가 눈에 더 들어온다. 그렇다고 별안간 떼죽음을 당하는 건 또 아니다. 기후위기보다 사실 가문비나무가 빠르게 사라진 건 인간의 과도한 개발 활동 때문이니까. 가문비나무가 자라는 곳은 백두대간 1500m 산정 중에서도 특히 눈이 잘 녹지 않는 장소다. 그간의 스키장 건설로 가문비나무 군락지는 너무 쉽게 없어졌다. 참사를 면한 개체가 남아 지금의 가문비나무 군락지를 가까스로 유지하는 셈이다.

개발 활동으로 사라져가는 군락지
계방산 정상 부근에 사는 가문비나무. 강원도 평창군과 홍천군에 걸쳐 있는 계방산의 높이는 1579.1m로, 남한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산이다. 사진 허태임

계방산 정상 부근에 사는 가문비나무. 강원도 평창군과 홍천군에 걸쳐 있는 계방산의 높이는 1579.1m로, 남한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산이다. 사진 허태임


관악기와 타악기와 현악기로 다시 태어나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오래 살기도 하는 그 나무들을 음향목(톤우드)이라고 부른다. 바이올린의 공명판으로는 음향목 중에 가문비나무가 최고라고 현악기 제작자 마틴 슐레스케는 그의 저서 <가문비나무의 노래>에서 말한다. 대대로 바이올린을 만들어온 가문에는 ‘노래하는 나무’를 찾아낼 줄 아는 그들만의 비법이 있다는 것을 그 책에서 나는 인상 깊게 읽었다. 산속 계곡에서 나무를 뗏목으로 묶어 나르던 때 물살이 센 곳에 이르면 나무둥치들이 서로 부딪혀 소리가 나는데, 그 순간 귀를 기울여 청명한 울림을 내는 나무를 가려냈다고 한다. 노래하는 나무가 될 만한 재목은 1만 그루 중 한 그루가 될까 말까 해서 재목을 고르는 일은 인내가 필요한 모험이라고. 장인의 손에서 바이올린으로 다시 태어난 나무는 숲에서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울림을 사후에 내게 된다고. 마틴 슐레스케의 말이다.

우리 전통 악기 가야금과 거문고를 만드는 선조들 또한 나무의 소리를 먼저 들었다. 오동나무가 30년에서 50년 정도 되면 똑똑 나무를 두드려보고 재목을 고르고 골랐다. 선별된 오동나무의 결을 다듬고 판의 표면을 인두로 지지고 잣기름으로 자르르하게 윤기를 더했다. 그렇게 장인의 손을 거쳐 공명통으로 다시 태어난 오동나무는 명주실 현을 받아들이며 노래하는 나무가 된다. 더 오래 살게 된다.

북유럽에서 명인들이 바이올린 만들 때 쓰는 가문비나무는 독일가문비나무다. 이 나무를 유럽에서는 노르웨이가문비나무라고 부른다. 우리는 좀 잘못 쓰고 있다. 과거 일본 사람이 독일에 가서 이 나무를 가져와 우리나라에 심었기 때문에 독일가문비나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독일가문비나무. 국제생물다양성기구 제공

독일가문비나무. 국제생물다양성기구 제공


노르웨이의 숲은 독일가문비나무의 숲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북극의 빙하와 만년설을 가까이 둔 곳, 눈이 많이 오는 곳에서 독일가문비나무는 가지를 아래로 축 늘어뜨린 모습으로 산다. 그건 눈이 금세 쌓이는 고장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간 우지끈 부러지기 쉽다는 걸 독일가문비나무 스스로 일찍 터득했기 때문이다. 독일가문비나무가 가지며 열매를 아래로 한껏 드리운 채 사는 모습은 그들을 같은 혈통의 다른 나무들과 구분하는 특징이 된다.

바이올린의 쨍한 음향을 내는 데 독일가문비나무가 적합한 이유를 식물학자와 음향학자들은 나이테에 있다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세포 구조가 규칙적이고 촘촘해서 공명이 좋고 여음이 길며 높은 음역에 잘 반응하기 때문이라고. 그렇다고 한 대의 바이올린을 독일가문비나무 단 한 종으로만 만드는 건 아니다. 바이올린의 앞판은 보통 독일가문비나무를 쓰고 뒤판은 독일가문비나무와 마찬가지로 북유럽에 자생하는 단풍나무 종류, 개버즘단풍나무를 쓴다는 것을 학부 때 전공 시간에 배웠다.

혹독한 환경에서 느리게 자라 ‘명품 악기’로

나무의 나이테는 진실하다. 자란 환경을 고스란히 비추기 때문이다. 봄철 온화한 때 나무는 빨리 큰다. 생성된 세포는 막이 얇고 모양이 크다. 이 시기에 창조된 나이테 부분을 춘재(春材)라고 한다. 1년을 놓고 볼 때 먼저 형성됐다고 조재(早材)라고도 부른다. 색은 연하고 재질은 부드러우며 무르다. 반대로 생장이 더뎌지는 가을과 겨울에 만들어진 부분을 추재(秋材) 또는 만재(晩材)라고 한다. 세포는 막이 굵고 모양이 작아 색이 짙게 보인다. 재질은 치밀하고 단단하다. 사계절이 뚜렷한 곳에서 나무에 새겨진 춘재와 추재는 그 경계가 그렇지 않은 곳에서 만들어진 것보다 훨씬 선명하다. 춘재와 추재를 묶어서 하나의 연륜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나무를 자른 면에 나타나는 그 둥근 테를 헤아리면 그 나무의 나이를 알 수 있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300년 된 바이올린.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300년 된 바이올린.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세계적인 명품 바이올린 가운데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있다. 그걸 만든 이탈리아 명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1644~1737)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악기 제조 기술은 첨단을 걷고 있으나 300여 년이 지나도록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뛰어넘는 바이올린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자연이 만든 재목과 천재의 기술이 딱 맞아떨어진 타이밍은 그때뿐이었다고.

나무의 나이테를 통해 과거의 자연환경과 기후의 변화 등을 밝히는 연륜 연대학자들은 1650년부터 1710년 사이 태양 활동이 감소했다고 본다. 북반구 대부분 지역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그 시기를 ‘소빙하기’라고 한다. 고산의 빙하가 계곡을 타고 농지까지 확장됐다. 영국 템스강과 네덜란드의 운하가 얼어붙었다. 이상기온으로 유럽 전역에 가뭄이 길었고 가뭄 끝에 갑자기 내린 폭우는 마을과 논밭을 덮쳤다. 우리나라는 조선 현종 재위 기간인 1670년(경술년) 무렵 조선 팔도가 빠짐없이 흉작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경신대기근’으로 기록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

그 시기 알프스산맥 수목한계선에서 자란 가문비나무를 천재 제작자 스트라디바리가 알아보고 고르고 골라 명품 현악기를 만들었노라 일찍이 학자들은 밝혔다. 소빙하기 고지대 혹독한 환경에서 느리게 자란 독일가문비나무는 나이테 간격이 빽빽하고 나뭇결의 밀도는 매우 높아 공명에 적합한 음향목이 됐던 것. 지구 평균기온은 안타깝게도 그 이후로 꾸준히 상승했다. 별난 기술이 다 나올지라도 소빙하기에 자란 목질의 나무는 나올 수 없게 돼버렸다.

명연주자 만나 온몸으로 부르짖는 공명

스트라디바리의 손에서 명품 악기가 탄생하던 그 무렵 바흐는 현악기를 위한 샤콘을 썼다. 가문비나무의 공명을 느끼기에 몹시 적확한 그 곡은 슬픔과 분노와 자멸과 포기와 망각과 때로는 온유와 평화와 같은 감정을 교차로 불러일으키며 내게 전율을 느끼게 한다. 특히 10여 년 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명동성당 대성전 중간 통로에 홀로 우뚝 서서 연주한 곡은 언제 들어도 와르르 소름이 돋는다. 가문비나무가 다 같이 모여 부르는 추모곡 같다. 아니, 가문비나무가 저승에서 쓸쓸히 추는 군무 같다. 그 나무를 알아본 장인의 손에서 악기로 다시 태어난 그가, 그의 결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연주자를 만났을 때 온몸으로 부르짖는 그 공명!

공명은 물리학에서 말하는 외력에 의한 진동이다. 무지막지한 힘의 작용이 아니라 박자에 맞춘 반응을 말한다. 바이올린에서 활이 현을 긁어 진동을 일으키면 그 소리가 공명통에 닿아 더 큰 울림으로 퍼져 나가는 현상. 그렇다면 누군가의 사상이나 행동에 공감해 따르는 것 또한 공명 아닐까. 어떤 사람의 자비로운 마음이 자비의 파장을 일으켜 주변을 온통 자비로운 기운으로 바꾸는 일이야말로 업(業)이며 깊은 울림일 것이라고 자꾸만 더 짙어지는 유월의 가문비나무 숲은 내게 공명(共鳴)한다.

허태임 식물분류학자·<나의 초록목록> 저자

 

*연재 소개: 식물학자가 산과 들에서 식물을 통해 보고 듣고 받아 적은 익숙하지만 정작 제대로 몰랐던 우리 식물 이야기.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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