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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걱정

등록 2022-09-29 14:20 수정 2022-09-29 23:22
1431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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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이랑 지구가 아프대.” 예닐곱 살 무렵, 아이는 툭하면 화장실 전깃불 끄는 걸 잊어버렸다. 그때마다 나는 북극곰을 소환했다. 빙하가 녹아서 북극곰이 생존 위기에 처했으니, 전기도 아껴쓰고 일회용품 사용도 줄여야 한다고 설명하면, 어떤 성마른 꾸지람보다 학습효과가 있었다. 바다거북의 코에 박힌 빨대 사진을 보고 난 뒤로 한동안 빨대를 사용하지 않을 만큼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여서 가능했던 ‘기후 교육’이다. 인터넷서점에 ‘북극곰’ 단어를 검색하면 10권이 넘는 그림책이 나온다. <북극곰에게 냉장고를 보내야겠어> <소고기를 덜 먹으면 북극곰을 구할 수 있다고?> <북극곰의 집이 녹고 있어요!> 등등.

그런데 ‘기후변화의 최대 피해자’였던 북극곰이 이제는 ‘무서운 생태계 교란자’가 됐다.(‘이은희의 늙음의 과학’ 칼럼 참조) 바다가 따뜻해지면서 바다코끼리·물범 같은 먹잇감이 줄어들자, 북극곰은 육지에 있는 참솜깃오리의 둥지에서 알을 훔쳐먹거나 순록을 바다에 빠뜨려 잡아먹으며 겨우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북극곰의 잘못이 아니다. 기후변화 탓이다. 지구를 아프게 한 인간들 때문이다.

변한 것은 북극곰만이 아니다. 한반도 기후도 변했다. 2022년 갑작스러운 폭우로 서울 반지하집에서, 경북 포항 지하주차장에서 안타까운 죽음들이 이어졌다. 이번호 표지 사진은 태풍 힌남노가 덮친 9월6일 포항 바다의 모습이다. 건물보다 더 높이 솟구쳐 오른 파도, 흙탕물 포말은 ‘성난’ 지구가 내지르는 울부짖음같이 느껴진다.

한국뿐 아니라, 홍수로 인해 파키스탄에서 2022년에만 1559명이 숨졌다. 이 가운데 3분의 1은 어린이다. 국토의 3분의 1이 잠겼다. 3300만 명이 홍수 피해를 보았다. 파키스탄이 위치한 남아시아에 6~9월 불어오는 ‘몬순’은 폭우를 불러온다. 특히 올해는 3주 사이에 1년 평균 강수량의 절반 이상이 쏟아져내렸다. 기후변화로 인한 ‘괴물 몬순’ 탓이다.

파키스탄 국민이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전체 온실가스양의 0.4%에 불과하다. 파키스탄, 푸에르토리코, 방글라데시 등 자연재해로 고통을 겪고 세계기후위험지수에서 취약국으로 꼽힌 나라들은 모두 가난하다. 전세계 온실가스의 80%를 배출하는 것은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20개국인데도 말이다. 2021년 영국 글래스고에서 10만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며 기후불평등과 싸운 아사드 레만 ‘워온원트’ 사무총장이 비유했듯이 “기후위기는 타이타닉호”와 같다. 맨 아래 칸에 탄 가난한 나라들은 이미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반면 제일 위 칸의 나라들은 여유롭다.

기후재난에 대한 언론과 세상의 관심도 불평등하다. 파키스탄의 심각한 재난 상황은 대부분의 국내 언론에 단신으로 언급되는 데 그쳤다. 우크라이나 전쟁 때처럼 특파원을 파견해 적극 취재하는 언론은 없다. 기후위기와 기후정의를 다루는 이번호 표지이야기에 파키스탄 재난을 가장 앞세워 기사로 쓴 이유다.

2018년 열다섯 살 그레타 툰베리가 유엔 기후정상회의에 참석해 세계 지도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2078년이면 저는 75살 생일을 맞을 것입니다. 제가 아이들을 낳는다면 (중략) 어쩌면 그 애들은 제게 여러분에 대해 물어볼지도 모릅니다. 왜 행동에 나설 시간이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냐고. 여러분은 다른 무엇보다 여러분의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 자녀의 눈앞에서 자녀의 미래를 강탈하고 있습니다.”(<미래의 지구>)

기후위기 상황에 지레 포기하는 대신, 우리 미래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며, 변화가 불가능하지 않다고 목소리 높이는, 또 다른 그레타 툰베리들이 2019년부터 해마다 9월 전세계에서 ‘세계기후행동’이라는 이름의 거리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국에서도 2022년 9월24일 ‘기후정의 행동의 날’ 행사가 대규모로 열린다.

이번호는 잡지의 절반 이상인 40쪽을 기후 관련 내용으로만 채웠다. 일부를 발췌해 16쪽짜리 특별판으로 만들어 ‘924 기후정의행진’에서 배포한다. ‘기후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그 길에 함께 선다는 마음으로, 북극곰을 걱정하는 아이의 미래를 강탈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비건 비긴’ ‘쓰레기 TMI’ 통권호에 이어 기후 문제에 <한겨레21>은 진심이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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