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으로 취임하고 빈손으로 퇴임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시민이 되어 이웃과 정을 나눌 수 있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자랑으로 남겠습니다.”
2017년 5월10일, 제19대 대통령 임기를 시작하는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취임사를 낭독할 때, 개인적으로 가장 뭉클했던 대목은 이 부분이었다. 두고두고 회자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문장보다 이 말이 더 좋았다. ‘평범한 시민’이 된 대통령.
지금까지 그런 대통령은 없었다. 아니,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살고자 한 대통령이 있긴 했으나 그의 소박한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른 전임 대통령들은 탄핵돼, 또는 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감옥에 갇혔다. 자택으로 돌아간 대통령들도 있었으나 ‘시민’으로 살지는 않았다. 그분들은 나들이 갈 때마다 수시로 교통 통제 예우를 요구하는 ‘황제’로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문재인 대통령이 굳이 취임사에서 “불행한 대통령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면서 “이번 선거를 계기로 이 불행한 역사는 종식돼야 한다”고 강조한 까닭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2022년 5월9일 오후 6시,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정문에서 걸어나와 임기 마지막 날 일정을 마칠 예정이다. 다음날인 5월10일에는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경남 양산시 하북면 평산마을에 있는 사저에 도착한다. 문 대통령은 취임 전에 양산시에 살았다. 이번에는 정말 마을을 터덜터덜 산책하고, 그러다가 만난 이웃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시민’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싶다.
5년 전, 문재인 정부의 첫마음을 떠올려본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던 다짐, 최저임금 인상 등 소득주도성장을 통해 ‘더불어 잘사는 경제’를 실현하겠다던 약속, 전국이 고르게 발전하는 균형발전을 이루고 남북 화해협력을 기반으로 ‘평화의 한반도’를 모색하겠다던 꿈이 찬란했다. 노동존중사회 실현, 소통하는 ‘광화문 대통령’, 탈원전 정책으로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로 전환, 사회적 차별 해소…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담긴 단어 하나하나가 기대를 품게 했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도 실망도 컸다. 소득주도성장, 한반도 평화, 탈핵(탈원전), 균형발전을 선언했던 문재인 정부의 첫마음이 어디서부터, 어떤 이유로 어그러지기 시작했는지를 이번호 표지이야기에서 짚어본 이유다.
물론 알고 있다. 5월10일 제20대 대통령으로 취임할 윤석열 대통령이 이 모든 것을, 어쩌면 5년 전보다 더 먼 옛날로 되돌려버릴지 모른다는 것을. 5월3일 발표된 윤석열 정부의 110대 국정과제만 봐도 문재인 정부와는 180도 달라진 정책 방향이 또렷하다. 탈원전은 폐기 처분됐고, 노동존중이나 평화와 같은 단어는 찾아보기도 힘들다. 방준호 기자가 표지이야기에 썼듯이, ‘불평등’이란 단어는 182쪽이나 되는 국정과제 문서에 ‘단 한 번’ 등장한다. 그것도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라는 국정목표를 설명하면서 ‘사는 곳의 차이가 기회와 생활의 격차로 이어지는 불평등을 멈추고…’라는 대목에서 단 한 번. 불평등 해소라는 꿈은, 이제 꿈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한때 품었던 첫마음이 그냥 잊히지 않기를 바라며, 문재인 정부 5년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기록했다.
대통령이 바뀌는 역사적인 순간에 발맞춘 것은 아니지만, <한겨레21> 뉴스룸에도 큰 변화가 있다. 엄지원·김선식 팀장과 김규남·방준호 기자가 신문 <한겨레>로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깊이 있는 분석, 탁월한 글쓰기로 <한겨레21> 지면을 빛내준 네 기자가 새로운 자리에서도 빛날 수 있도록 응원 부탁드린다. 이완·박기용 팀장과 이경미·김양진·손고운 기자가 <한겨레21> 뉴스룸에 합류했다. 다섯 기자는 이번호부터 차례로 독자면 ‘뉴스룸에서’를 통해 독자 여러분께 인사드릴 예정이다. 새 얼굴들에게도 많은 응원 부탁드린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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