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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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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당했다, 최선을 다했는데

등록 2021-12-25 13:57 수정 2021-12-26 00:05

이쑤시개를 버렸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2019년 2월 남편에게 죽도록 맞은 피해자는 여성긴급전화(1366)와 경찰에 전화해 “남편에게 맞았다. 처벌을 원한다”고 말했다. 이는 결국 피해자가 남긴 유언이 됐다. 며칠 지나지 않아 피해자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숨졌다. “사람에게서 돼지가 맞을 때의 목소리가 나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법정에서 아들은 학창 시절부터 목격해온 ‘지속적’이고 ‘극심’했던 아버지의 폭력을 증언했다.

<한겨레21> 뉴스룸 한쪽에는 이런 내용의 판결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대법원 판결문 검색 시스템을 통해 2016년 1월~2021년 11월 1심 판결이 선고된 남성에 의한 여성살해 사건 427건의 판결문을 모았다. 판결문 한 건당 적게는 3쪽 많게는 43쪽 분량으로, 모두 3500여 쪽에 이른다. 기자들은 밤새도록 판결문을 뒤적이면서 아내살해, 교제살해, 성매매 여성 살해, 강도·강간을 목적으로 한 살해 등 사건을 4개 유형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50여 개 세부항목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범행 양태, 판결 이유를 사건마다 분석했다. 입에 담기도 어려운 잔혹한 범행 수법, 어이없는 살해의 이유. 모니터 너머로 한숨 소리가 오갔다. 판결을 기사로 옮길 때 피해 사실을 어디까지 서술할 것인가 고민도 깊었다.

가장 궁금했던 건 살해 동기였다. 판결문 427건 중 300건(70%)에서 피고인의 감정적 동기가 드러났다. ‘놀면서 돈도 안 벌어온다고 무시해서’ ‘피해자가 말대꾸한다는 이유로’ ‘세입자인 남성에게 채무 문제로 잔소리해서’ ‘말다툼하던 중 피해자가 죽여봐, 죽여봐, 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별거나 이혼 사유여야 할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는) 외도도 살해의 이유가 됐다. 물론 이 모든 말은 가해자의 입에서 나왔다. “피해자가 사망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후적으로 자신에게만 유리하도록 사실관계를 허위 주장할 개연성”(의정부지법 고양지원 2018고합○○○)을 고려해도, 판결문 그 어느 곳에서도 사람을 죽일 만한 이유는 찾아내기 어려웠다.

그렇게 ‘적어도’ 500건의 페미사이드(남성에 의한 여성살해 사건)를 그러모아 살폈다. 가해자가 자살하는 바람에 법의 심판마저 피해간 73건도 같은 기간의 언론 보도를 검색해 포함시켰다. 잠시 분노하다 빠르게 잊힌 낱개의 페미사이드 사건들을 종합해 분석한 국내 언론의 첫 시도다. 모으니 패턴이 보였다. 특히 전·현 배우자나 연인관계에서 벌어지는 친밀한 관계에서의 페미사이드 사건은 3건 중 1건꼴로 가해자가 저질러온 폭력의 전력이 판결문에 적시됐다. 공권력이 조기 개입해 막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성매매 여성의 죽음에서는 최소한의 애도도, 보호장치도 찾을 수 없어 슬펐다.

“우리는 계속 이렇게 여성들이 죽임당해온 것인지, 갑자기 더 많이 죽임당하는 것인지 알 수조차 없다”며 국가의 공식통계 개선을 요구하고, “제도가 변하길 기다리기 전에 수사기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는 반응이 뉴스룸에 답지한다. <한겨레21>이 만든 특별 웹페이지(speakup.hani.co.kr)에는 내밀한 폭력 피해의 기억들을 공유해주는 수백 명의 목소리가 차곡차곡 쌓인다. “당신은 살해당했다는 문구가 뜰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다. 나는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피해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텐데….” 폭력적인 배우자와의 안전이별 시나리오를 담은 특별 웹페이지(stop-femicide.hani.co.kr)에서 실제 사건 피해자들의 삶을 접한 한 독자 의견엔 피해자를 향한 깊은 추모가 담겼다.

흩어진 죽음을 한데 모아 명명하는 일이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이라 믿는다. <한겨레21>은 묵묵히 기록하는 자세로 그 출발선에 함께하겠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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