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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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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의 그늘에서 사람을 봤습니다

등록 2021-09-01 12:31 수정 2021-09-02 02:27

“사람 살 데가 못 된다.”

재개발 구역을 돌아다니다보면 항상 한 번씩은 듣는 말입니다. 얼른 개발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은 재개발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낡은 주거환경을 호소하며 하는 말이기도, 재개발 매물을 소유한 조합원들이 빠른 사업 진행을 촉구하며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부동산 기자라는 특성상 후자의 사례를 더 많이 접했습니다.

조합 사무실을 찾아 골목골목 언덕을 오르고 좁은 비탈을 이리저리 살필 때면 저도 모르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가파른 언덕이 영 낯설고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계단보다는 에스컬레이터가, 울퉁불퉁한 골목보다는 반질반질한 도로가 제게 더 익숙했던 겁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근사한 풍경에 브랜드 아파트가 들어서면 얼마나 살기 좋을까. 외지인인 저조차 한남3구역의 ‘현재’에 서서 ‘미래’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미래에 사로잡힌 저를 잡아끈 건 한남3구역 꼭대기, 도깨비시장의 한 부동산입니다. 재개발 투자를 강조하던 구역 아래 부동산들과 달리 큼지막하고 떨리는 글씨체로, ‘살 집’을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월세는 ‘500/35, 1000/40’. 전세는 최하 3천만원까지. ‘와 싸다’라는 감탄이 저도 모르게 나왔습니다. 팍팍하고 값비싼 것이 곧 도시 생활인 줄 알았는데 그 부동산은 전혀 다른 풍경을 자아냈습니다.

팍팍한 서울살이 중 마음 편히 내 몸을 누일 수 있는 곳. 잘 드러나지 않은 한남3구역의 면모입니다. 그제야 복작복작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공터에서 뛰노는 이민자의 자녀들, 삼삼오오 가판에 둘러앉은 주민들. 어쩌면 너무 당연한 건데 재개발 구역에도 사람이 산다는 사실을 간과해왔습니다. 개발에만 몰두하다보니 사람이 안 보였습니다.

쉽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낡고 지저분한 재개발 지역이 남들이 선망하는 브랜드 아파트로, 그것도 ‘하이엔드 브랜드’ 아파트로 탈바꿈하니 좋은 일이고, 세입자는 저렴한 가격으로 새 아파트에 마련된 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있으니 좋고, 집주인은 오래도록 염원하던 새 아파트 ‘내 집’에 들어가서 좋고, 투자자는 차익을 남겨서 이 모든 게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한남3구역 세입자인 선엽씨는 임대아파트를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해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면 다달이 이자를 내야 한다”며 “그저 지금처럼 낡았더라도 사는 동안은 주거비 부담이 전혀 없는 전셋집을 원한다”고 합니다. 선엽씨는 새 아파트보다도 월 지출을 한 푼이라도 줄이는 게 우선입니다. 다른 주민들도 “절차가 복잡하고 오래 걸린다” “임대아파트 관리비를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 모두 제각각이지만 임대아파트에 손사래를 치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근로소득이 있는 젊은 사람에게 재개발 임대아파트는 매력적인 가격일지 몰라도 기초생활수급자인 선엽씨처럼 주거 약자들에겐 여전히 부담입니다.

원주민인 종성씨는 희망을 안고 있지만 지난한 시간을 앞으로 견뎌야 합니다. 투자자인 형주씨도 ‘좋은 물건’(아파트)을 만들기 위해 언성을 높이기 일쑤입니다. 개발이라는 커다란 담론 안 사람들의 현재는 얼마나 행복한가요.

지혜진 <뉴스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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