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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토크] #미투, 각자의 숨구멍

등록 2021-03-06 12:13 수정 2021-03-10 01:14

2015년 시작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많은 여성이 전장에 나선 전사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21년까지도, 숨 돌릴 틈 없이 각종 성폭력·성차별 고발과 운동이 이어지기 때문이죠. 늘 촉수를 곤두세우고 사는 것만도 피곤한데 직접 행동에 나서고 시시각각 덮쳐오는 여성혐오의 파도에도 맞서야 합니다.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임을 고발해야 했던 서지현 검사, 장혜영 정의당 의원, 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더욱이 온 사회에 얼굴을 드러내야 했으니 아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짐이 더해졌을 테지요. 그럼에도 이들의 경험과 말하기가 계속 공유돼야 한다고 생각해 세 분을 한자리에서 만났습니다. 검찰, 국회, 정당. 이들이 속한 조직은 법과 제도를 관할하고 정의를 기치로 내세우는 공적 영역이니까요. 이곳부터 달라져야 전 사회로 유의미한 변화가 확산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좌담 자리에선 이들의 생각만큼이나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일상을 어떻게 지탱하고 사는지, 나를 어떻게 지키며 삶을 이어나가는지입니다. 앞서 적은 것처럼, 쉽게 지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계속되니까요.

서 검사는 유튜브에서 각종 동물 영상을 찾아보면서 힐링한다고 합니다. 인류애가 완전히 사라질 것만 같을 때 여러 동물의 귀여움으로 희망을 충전하는 셈이죠. 가족사진을 제외하면 휴대전화 앨범 대부분은 동물 사진과 영상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장 의원은 바쁜 와중에도 서가에서 눈에 들어오는 책을 집어 하루에 한 쪽은 반드시 읽는다고 합니다. 틈새 시간을 활용해 좋아하는 영화의 장면을 여러 번 돌려보기도 하고요. 장 의원은 영화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 후반부에서 프로도와 샘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 영화 <한나 아렌트>에서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에 대해 강의하는 모습을 ‘최애’ 장면으로 꼽았습니다. “늘 현장에 깊이 몰두하다보면 그 안에 갇혀버리는 느낌이 있어요. 다른 입체감이 필요하죠.” 그는 이런 활동조차 없다면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신 대표는 게임으로 한숨 돌립니다. 특히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을 즐기는데, 요즘은 <블러드본>이란 비디오게임을 한답니다. “칼을 계속 휘둘러야 하는 게임이에요. (웃음) 속으로 쌓이는 화를 이렇게 푸는 거죠. 농사짓는 게임처럼 평화로운 건 안 돼요.” 신 대표는 “저만 모범생이 아닌가요?”라며 호기롭게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이런 일상의 작은 조각이 일종의 숨구멍일 겁니다. 이 질문을 던지면서, 저는 기사를 읽는 많은 여성이 각자만의 숨구멍을 찾아보길 바랐습니다. 전력을 다해 싸우는데도 변화가 더뎌 현실이 갑갑할 때가 있잖아요. 온라인에서 함께 분노하다가도 정작 지인에겐 ‘페미니즘’이란 말도 꺼내기 어려워 외로울 때도 있고요. 직장과 학교에서 발생하는 부당한 차별에 내 신념대로 저항하지 못해 좌절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때 자신만의 숨구멍이 있어야 일상을 안온하게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요.

뿌리 깊은 불평등과 성차별을 바꿔나가려면 폭발할 만큼 에너지를 쏟아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의 에너지를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여성이 각자의 숨구멍을 찾아 일상을 이어가길 바랍니다. 그래야 변화를 함께 지켜볼 수 있으니까요.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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