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업무상 위력(상대를 압도할 만큼 강력한 힘)을 이용한 성폭력 범죄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사건 판결문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서울시장 비서실에서 일하며 “심기 보좌 혹은 ‘기쁨조’와 같은 역할”을 암묵적으로 강요받았으며 “피해 사실을 서울시 관계자들에게 말했지만 피해를 사소화했다”는 호소는 안 전 지사 사건에서 나타난 징후와 너무나 닮았습니다.
김지은씨는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을 담은 책 <김지은입니다>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지사님 기쁨조가 되고 싶어도 우린 남자라서 못하니까 너희가 최선을 다해’ 여성 참모들에게 그런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했다. 이런 술 문화는 조직 내에 만연했다.”
피해자의 문제제기 움직임이 ‘알 수 없는 경로로’ 즉각 상대방에게 알려진 것도 유사합니다.
“신분을 보호받으며 고발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은 상황임을 알게 되었다. 고소장을 제출하기 전까지는 어떤 보도도 원치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기자를 만난 바로 다음날) 안희정에게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빨라도 너무 빨랐다.”(<김지은입니다> 27쪽)
공사 업무 경계가 모호한 비서 업무의 특수성도 이미 거론된 바 있습니다. 공공기관에서 비서를 했던 어느 노동자는 재판부에 이러한 내용이 담긴 탄원서를 보냅니다.
“비서는 지시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거스를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상사를 충실히 보좌하는 비서라는 전문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부당한 것에 싫다고 말하라고요? 아니라고 하라고요? 이런 언사는 비서 역할과 특수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ㄱ씨는 ‘지자체장의 심기 보좌를 위해 비서로 일하며 온갖 수발을 들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함이고, 그래야 일할 자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여성에게도 이런 위력이 먹힌다는 걸 알면 성(性)적으로 괴롭힘이 확대된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까지 지자체에서 별정직 공무원으로 일한 한 여성은 ‘행복권을 포기한 대신 노동권’을 확보하기 위해 분투한 시간을 들려주었습니다. 일상적인 성차별과 불쾌한 신체 접촉이 버젓이 이어졌다고 했습니다. 안 전 지사의 법정 공방 소식을 접하면서 ‘문제가 있는 구조’에 얼마나 주목했나 되짚어봅니다. 그보단 에 나와 하얗게 질린 채 말을 이어가던 피해자를 자주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안 전 지사는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범죄 피해가 일어났던 충남도청에는 변화가 거의 없었습니다. 익명을 요청한 충남도 공무원은 “전담기구 등 제도가 아무리 잘 마련돼 있어도 도지사가 절대 권력인 폐쇄적, 수직적 분위기에서는 불이익을 우려해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고 전합니다. 또다시 위험 징후가 나타났습니다. 바뀌지 않으면 반복될 문제입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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