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주간의 하나원 교육을 마친 북한이탈주민은 ‘신변보호담당 경찰관’(신변보호관)과 적어도 5년간 만납니다. 북한에서 안전원을, 중국에서 공안(경찰)을 경험한 이들은 신변보호관을 감시관으로 인식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존 관계가 형성돼, 북한이탈주민은 한국 사회 정착 과정에서 어려움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입니다. 싱글맘,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처럼 사회경제적 약자일수록 신변보호관에 대한 의존도가 높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게 된 신변보호관은 북한이탈주민의 일상을 지배하고, 때로 악용하는 일이 생겨납니다. 그루밍 성범죄가 대표적입니다. 주요 대상은 ‘나홀로 북한이탈여성’입니다. 북한이탈주민 중 여성 비중은 75.4%, 여성 1인 가구는 26.6%나 되니까요. 가해자 중에는 경찰뿐 아니라 북한이탈여성에게서 정보를 얻어내던 군인도 있습니다.
이들은 결혼하지 않았다고 거짓말하고 한 달에 몇 차례씩 만나면서 살뜰하게 북한이탈여성을 챙겨줍니다. 첫 성폭력은 술 취한 피해자를 모텔로 끌고 가는 ‘준강간’ 형태로 이뤄집니다. 북한이탈여성들은 ‘여성이 육체적으로 범해지면 정조를 잃게 돼 그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식의 가부장 문화에 익숙한 탓에 그후로는 가해자에게 끌려다닙니다. 피해자는 임신과 중절수술을 반복하다가 가해자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무너집니다. 불면증, 우울증, 자살충동이 일상을 파괴합니다. 안정적인 삶을 꿈꾸며 국경을 넘었는데, 더 불안정한 삶에 다다른 거지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 자살도 시도하지만, 경찰에 신고하는 등 법적 절차를 밟을 엄두는 내지 못합니다. 성범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알더라도 가해자가 경찰·군인이라 보복을 두려워합니다. 낯선 땅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을 중의 을’은 자신을 탓하며 주저앉기 일쑤입니다.
<한겨레21>은 성폭력 상처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미투라는 길을 걷는 북한이탈여성을 만났습니다. 국군정보사령부 군인 2명을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로 국방부 검찰단(군검찰)에 고소한 한서은(가명)씨. 그도 처음부터 용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년이 넘는 그루밍 성착취와 두 번의 임신중절 뒤 가해자는 결혼 사실을 알리며 합의를 종용했습니다. ‘불미스러운 모든 일에 대한 합의금’이라며 500만원을 건넨 그는, ‘차후 일체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한다’는 합의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변호사 사무실에서 합의서 공증이 끝나자 가해자는 500만원을 돌려달라고 합니다. 생활비와 용돈이 없다는 그의 닦달에 현금 30만원을 주며 한씨는 깨닫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이용했구나.’
한국의 미투 운동과 성범죄 피해를 다룬 책들을 읽으며 한씨는 침묵을 깨기로 결심합니다. 수사를 맡은 군검찰이 한씨의 신변 보호 요구를 거절하고 2차 가해를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만 당한 게 아니구나!’ 생각하며, 그처럼 수치심을 딛고 일어서 #미투에 동참할 또 다른 북한이탈여성을 위해 버텨냅니다. 여성가족부가 2017년 북한이탈여성 158명을 설문조사했더니 25.2%가 “남한 내에서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고 밝히는 참혹한 현실에서 ‘을 중 을’의 소중한 #미투를 응원합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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