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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저당 잡히다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9-04-22 18:24 수정 2020-05-03 04:29

며칠 전 오후 반차를 내고서 충남 논산에 내려가는 길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는 몹시 지쳐 보였다. 매년 이맘때 녹초가 되는 녀석이다. 법인세 신고로 1년 중 가장 바쁜 한철을 보낸 여느 회계사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전문직이라 먹고살 걱정이 덜할 듯한 친구에게 일을 좀 줄이라고 권했다. 친구는 의례적인 말에 진지하게 답한다. “한 15년 바짝 일해야지. 애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하고 그 뒤엔 내 맘대로 살 거야. 시골에 혼자 내려가 작은 흙집을 짓고. 못 잔 잠도 실컷 자야지.” 그러면서 차창 밖 밤나무로 뒤덮인 산 중턱에 자리잡은 어느 외딴 시골집을 가리켰다. “딱 저거야. 저런 데서 ‘자연인’처럼 살고 싶어.” 스치는 풍경에 친구는 잠시 들떴다.

“늙으면 무슨 소용이니. 그러다 죽어.” 이리저리 찔러봤지만 돌부처 같은 마음은 틈새가 보이지 않았다. 조수석에 앉은 친구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를 하나 둔 녀석은 앞으로도 계속 일에 빠져 살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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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보한 채 산다. 오지 않을지도 모를 먼 미래를 위해 몸과 마음의 허리띠를 졸라맸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을 훗날 누리겠다며 하루하루 자신을 일에 갈아넣는다. 지금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미래를 준비한다.

‘저축의 역설’이란 말이 있다. 돈을 쓰지는 않고 너도나도 모으려고만 하면 돈이 돌지 않아 경제가 더 망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구성의 오류도 비슷한 의미로 풀어쓸 수 있다. 경제주체 하나하나는 미래를 위해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듯 보이지만 경제 전체로 확대하면 두루두루 못살게 하는 원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소비를 미루거나 크게 줄일 때 나타나는 이 역설은 비단 경제만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행복에도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다.

미래를 대비하는 친구의 또 다른 방식은 보험이었다. 정확히 보험을 몇 개나 들었는지 기억조차 못했다. 한 20개는 되는 것 같단다. “왜 그리 많이 들었냐”고 물으니, “무서우니까” “혹시 몰라서”란다. 죽을지 다칠지 갑자기 어떻게 될지 모르니 부지런히 가입했나보다. 사실 친구 같은 이는 널렸다. 국민건강보험만 믿고 있다가 아프면 길거리에 나앉을까봐 생명보험, 암보험, 상해보험, 실손보험 등 온갖 보험을 다 든다. 보험사들은 사람들의 불안을 부채질한다. 실상 민간 보험에 들 돈으로 보장성 60%대인 국민건강보험의 보장 범위를 훨씬 더 넓힐 수 있겠지만, 의료보험은 공공과 민간의 어정쩡한 이중 구조를 유지한다. 불안을 대비해 여러 보험에 가입하는 개인의 ‘낭비’는 제도적 정책적 ‘결핍’이 불러온 현상이다.

친구는 노후 대비용으로 개인연금도 2~3개 들었다. 국민연금이 있는데 개인연금을 왜 들었냐고 하니 “혹시 몰라서”란다. 친구만이 아니다. 국민연금만 들어서는 늙어서 가난하게 살까봐 국민연금보다 수익률도 낮고 안정성도 떨어지는 개인연금을 드는 이들은 흔하다. 불안한 노후를 위해 부지런히 저축하고 소비를 미룬다. 금융사들의 상술은 이를 부채질한다. 노후에 한 20억원은 필요하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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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유로 미래에 매여 사는 개인이 너무 많다. 은행에서 무리하게 돈을 꿔서라도 집을 사지 않으면 뛰는 집값을 따라잡지 못할 것 같고, 자녀 사교육에 돈을 쏟아붓지 않으면 입시 경쟁에 자녀가 뒤처질까봐 쫓기는 세상이다. 불안한 미래에 저당 잡힌 채 돈은 묶이고, 삶의 가치는 뒤로 밀려난다. 미래에 대응하는 지금 방식은 살아남기 위한, 더 잘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 모른다. 이를 바꿔주지 않는다면 친구 녀석 그리고 우리의 불안과 불행, 한국 경제의 불안과 부진도 탈출구를 찾지 못할지 모른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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