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새 만에 열린 하늘은 제법 파란빛을 띠었지만 덜 풀린 날씨 탓인지 노인들은 짐작보다 적었다. 공원 쉼터 탁자 위에 삼삼오오 모여 바둑판과 장기판을 벌이고 더 많은 훈수꾼이 빙 둘러싼 풍경을 머릿속에 그렸지만, 운동기구를 붙잡고 팔다리를 놀리는 노인 몇이 전부였다. 근방에 일 보러 왔다가 잠시 서울 마포구 효창공원에 들렀다는 팔십 노인이 언덕 초입, 대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에 기대 잠시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미세먼지가 가라앉은 틈을 타 서대문구 홍제동에서 지하철을 타고 왔단다. 카드 결제시 1350원의 요금을 물어야 하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지하철 요금을 내본 기억이 없다 한다. 그의 뒤를 잇는 노인들이 맞이할 현실은 다를지 모른다.
엉뚱한 곳에서 불똥이 튀었다. 지난달 대법원에서 나온 판결 때문이다. 사망하거나 노동력을 잃은 피해자를 위한 손해배상액을 계산할 때 기준이 되는 육체노동자의 ‘노동가동연한’(노동으로 수익을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연령의 상한)을 60살에서 65살로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보험료 인상 등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끼칠 것이란 전망은 애꿎은 노인 무임승차 문제로까지 번졌다.
“서울교통공사는 지난해 무임승차 비용으로 3540억원을 부담했다.” 점잔을 뺀 제목을 단 어느 신문의 기사 내용인데, 이참에 무임승차 연령을 5살 높여 70살로 정해 도시철도 손실을 줄이자 한다. 대개 언론의 기사와 사설의 논조도 이와 엇비슷하다.
여기에 몇 가지 얼치기 논리와 셈법이 반복재생된다. 지난해 서울교통공사의 ‘무임 손실 비용’은 약 3540억원이 맞다. 그 가운데 노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82%(2886억원)인데, 무임승차로 생긴 손실 비용이 모두 노인 때문인 것처럼 뭉뚱그려 서술된다. 장애인과 유공자에게서 비롯된 손실 비용은 생략되기 일쑤다.
무임승차 노인이 도시철도 손실에 큰 부분을 차지하니 나이를 올려 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논리도 횡행하지만 비약이다. 서울교통공사의 지난해 손실액은 5375억원에 이르지만, 무임승차 나이를 5살 올려봤자 무임승차 손실 감소는 수백억원에 그친다.
부정적 효과는 무시된다. 무임승차 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노인은 지하철을 맘껏 탈 수 없다. 무임은 유임으로 그대로 전환되지 않는다. 노인 이용객은 줄 수밖에 없다. 논란에 비해 도시철도의 손익 개선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홍제동 노인은 반문한다. “노인네들 대부분 지하철을 탄다. 공짜니까 천안까지 가는 거지. 가서 뭐하겠나, 밥이라도 먹고 오는 거지. 요금을 문다면 거기까지 가겠나?” 지하철 노인 이용객이 줄면 강원도 춘천역 주변 닭갈비나 막국수 가게, 서울 탑골공원 주변 허름한 골목 식당 등의 노인 손님도 따라 줄 게다. 몇몇 역사 주변 소비가 위축된다고 하면 지나친 주장일까.
노인 무임승차 역사는 40년이나 됐다. 1980년, 70살 이상 고령자의 요금 50% 할인에서 출발한 제도는 1984년 노인복지법이 시행되면서 65살 이상 노인의 무임승차로 정착됐다. 도시철도에 재정 부담을 주지만 노인이동권이란 복지를 제공한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노동으로 수익을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연령의 법적 상한 또한 높아졌으나, 실제 일할 기회와 소득이 늘어나는 건 아니다. 되레 노인 빈곤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노인 둘 중 한 명은 상대적 빈곤에 놓였다. 인구를 소득액에 따라 줄 세웠을 때, 정가운데 소득자의 절반만큼에도 못 미치는 소득을 올리는 노인이 50%에 이른다는 뜻이다. 노인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네 배나 된다.
노인복지법을 바꿔 노인 기준을 65살에서 70살로 늘려 수백억원의 무임승차 손실 비용을 아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사이에 낀 노인들이 잃는 이동권을 포함한 여러 복지는 어찌할 것인가. 정년을 그만큼 늘려줄 수 있다면 모를까. “무임승차 연령을 그대로 하면야 좋지만, 정 올려야 한다면 2~3살 높일 수는 있겠지. 그러면 정년도 올려줘야 하지 않나.” 3월8일 낮에 만난 홍제동 노인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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