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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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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

등록 2015-12-15 16:18 수정 2020-05-03 04:28

불면이 천장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밤이면 내일의 노동을 위해 억지로 잠을 불러들여야 한다. 각자 비법이 있겠지만, 나는 상상한다.

제주 바닷가에 작은 돌집을 짓고, 마당엔 푸르고 뾰족한 잎사귀의 마늘을 심고(나는 마늘을 좋아한다), 석양을 기다리며 글을 쓸 것이다. 다만 몸에 땀 차는 걸 싫어하므로 후텁지근한 여름엔 동해로 옮길 것이다. 속초 어디쯤 울타리 없는 집을 짓고, 마당엔 푸르고 부들부들한 잎사귀의 상추를 심고(상추도 좋아한다), 소나무 그늘 아래서 글을 쓸 것이다. 그렇게 겨울궁전과 여름궁전을 오가노라면, 천장에 매달렸던 불면이 훌러덩 잠의 수렁에 빠져버린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허황된 자부심을 믿거나, 출판시장이 무너져도 글로 벌어먹을 수 있다는 타산이 생긴 게 아니다. 그저 글 쓰겠다고 앉아 있는 게 좋다. 좋은 글이 나올 리 없는 재능이어도 괜찮다. 못난 삶에도 무작정 맞닥뜨리고 싶은 일이 있는 법인데, 나에겐 글쓰기가 그렇다.

기원을 되짚어보면, 문고판 세계문학을 엎드려 읽는 작은 아이를 만난다. 일고여덟 살 무렵, 나는 를 읽었다. 알다시피 네로는 시골 고아다. 버림받은 개 파트라슈가 유일한 친구였다. 우유를 배달해 끼니를 구했다. 좋아하는 아로아에게 줄 수 있는 건 직접 그린 목탄 초상화뿐이었다. 독학한 그림을 출품했으나 배움 높은 심사위원들은 외면했다. 흠모하는 화가의 그림이 동네 성당에 걸렸지만, 돈이 없어 들어갈 수 없었다. 급기야 사람들은 네로를 방화범으로 지목했다. 추운 겨울밤, 쫓겨 피신한 성당에서 네로는 루벤스의 그림을 만난다. 행운은 짧았다. 네로와 파트라슈는 그림 앞에서 굶주린 채 얼어 죽었다.

나는 고만 베개에 코를 묻고 엉엉 울었다. 모험·영웅·행복에 대한 책만 읽다가, 고립되어 패배당하는 선량함을 처음 알게 됐다. 세상은 위대한 영웅의 행진이 아니라 슬픈 개인의 순례로 가득 차 있음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 어린 날의 가망 없는 열망이 오늘의 망상에 이른다.

원래 글은 행복이 아니라 슬픔의 편이다. 행복한 자는 글 쓸 이유가 없다. 상실하여 슬프고, 갈등하여 흔들리며, 버둥대다 지친 사람이 토악질하듯 써대는 게 글이다. 그렇게 자기 치유를 위해 쓴 글은 또 다른 슬픈 개인에게 가닿아 그를 위로한다. 개인적인 것에서 출발해 사회적인 것에 이른 글은 슬픔을 위로하는 교감의 도구이며, 그래서 연대의 무기다.

그러나 원래 슬픔의 도구인 글쓰기를 슬플 일 없는 자들도 활용한다. 그들의 글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서 비롯하는데, 지배를 위한 셈법을 문장에 옮긴다.

민주노총과 한상균 위원장을 향해 ‘특권’ ‘귀족’ 운운하는 글이 보수 언론에 나돈다. 그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 글쟁이가 어딘가에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을 비정규직에 초점을 두고 바꿔보겠다는, 네로처럼 평생 가난하고 외롭게 쫓겨다녔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비판하려면, 비정규직 양산을 노동개혁으로 치장하는 박근혜 정부부터 후려갈겨야 한다.

그래본 적 없이, 낮은 자를 위한 슬픈 글을 도모한 적 없이, 업계 최고 월급 받으며 어디 가든 대접받는 보수 언론의 젊은 기자들이 얼치기 판관 흉내내는 글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 누가 시키면 제 이름과 얼굴은 빼달라고 생짜라도 부려야 한다. 그런 저항의 흔적이 없고, 기자의 본디 자리에 대한 성찰도 메말라버린 글을 볼 때마다, 나는 제주와 속초에서 이 시대의 네로에 대한 글을 읽고 쓰는 상상을 한다. 오직 상상만 하던 일을 젊은 작가들이 해냈다. ‘손바닥문학상’ 수상작을 싣는다. 독자보다 기자들이 읽으면 좋겠다. 세상이 천박하여 개나 소나 기자 명함을 박게 되니, 글쓰기가 개똥 소똥이 됐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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