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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의 나선 구조

등록 2015-06-09 14:03 수정 2020-05-03 04:28
안수찬 기자

안수찬 기자

내 마음속 냉소를 만져본다. 거칠고 차가운 것이 흉터투성이다. 흉터를 남긴 것은 분노다. 분노가 휩쓸고 간 자리에 냉소가 남는다. 그 기원은 놀랍게도 사랑에 있다. 무엇인가 사랑하고 기대다 배반당하면 광포한 분노에 휩싸인다. 분노는 응징 또는 변화를 추구하는 행동의 태도다. 그조차 가망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분노가 곰삭으면 냉소가 된다. 활화산 자리에 남은 삭막한 분화구와 같다. 냉소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고립의 언어다. 징그럽고 역겨우니 혼자 진저리 치지만 세상을 향해선 침묵한다. 가끔 혼잣말로 저주할 따름이다.

2008년 광우병 파동 때, 나는 분노를 보았다. 믿었던 국가권력에 배신당했다고 여긴 이들이 광장에 나왔다. 2015년 오늘, 메르스의 격랑 속에서 나는 냉소를 본다. 기대가 없었으니 그런 것인가. 오랜 분노가 이미 곰삭아버린 것인가. 사람들은 자발적인 고독, 즉 자가 격리 상태로 냉소하고 있다. 간혹 인터넷, 소셜네트워크 등에 저주의 언어가 등장할 뿐이다.

언론학자 카펠라와 제이미슨은 라는 책에서 대중의 ‘냉소’에 대해 썼다. 승패와 전략 중심의 정치 보도는 정치적 냉소를 확산시킨다. 정치도 못 믿겠고 언론도 못 믿겠으니 그저 침묵하는 게 좋겠다는 ‘반민주적’ 신념이 확산된다.

정치와 언론이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한 지는 오래전이겠고, 이번 메르스 파동은 ‘냉소의 나선 구조’를 더 심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주요 언론들은 메르스가 아니라 메르스에 대한 ‘싸움’을 다루기 시작했다. 국가적 재난에 분노하는 대신 권력 전체를 냉소하고, 그런 냉소를 제공하는 언론까지 냉소하는 일이 착착 진행될 것이다.

심연을 알 수 없는 냉소의 회오리에 휘말리면, 자신을 지킬 것은 자신밖에 없다. 각자도생을 도모하면, 가진 것이 많은 이들만 살아남는다. 교장에게 압력을 넣어 자녀의 학교를 휴교시킬 수 있고, 대중교통을 피해 자가용으로 출퇴근하고, 여럿이 모이는 사무실 대신 개인 집무실에서 일하며, 하던 일 작파하고 ‘메르스 청정 국가’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부자들만 살아남는다. 그런 일이 불가능한 이들은 메르스 바이러스를 호흡하며 매일 일한다.

카펠라는 냉소적(cynical)인 것과 회의적(skeptical)인 것을 구분한다. 모든 것에 대한 총체적 불신이 냉소라면, ‘회의’는 “저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니 진상을 밝혀보자”는 태도다. 이번호에 대단한 특종은 없다. 담담하게 사실을 밝히고 분석했다. 한국 사회에 아직 희망이 있다면, 어딘가에 살아남은 ‘회의주의자들’에게 있다. 우리는 냉소하지 않고 회의하겠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추신1. 은 와 뉴스 콘텐츠 제휴를 맺고 있다. 메르스 사태, 태극기 소각 청년 등에 대한 이번호 기사는 의 도움을 받았다. 앞으로 교류와 협력을 더 넓히겠다.
추신2. 지난 두 달여 동안 매만져온 ‘브리핑’ 코너를 완성했다. ‘바글바글10-한국’ ‘바글바글10-세계’ ‘이주의 키워드’ ‘월드와이드 Q4’ ‘더 친절한 기자의 뉴스 A/S’ ‘떠난 사람’ 등을 통해 꼭 알아야 할 뉴스를 맥락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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