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증오의 정치’는 어디서 시작됐을까? 2009년 이명박 정부 검찰의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와 그에 따른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 결정적 계기였다는 의견이 많다. 물론 그 전에도 1959년 이승만의 조봉암 ‘사법살인’이나 1970~1980년대 박정희와 전두환의 김대중 살해 시도와 같은 증오의 정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사례들은 독재자의 일방적인 정적 탄압이었다. 또 그 증오감이 지지자에게로 확산하거나 각 진영으로 갈려 다투지 않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불붙인 증오의 정치는 그전과는 결이 달랐다.
이 전 대통령은 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을까? 유력한 추정은 이 전 대통령의 집권 직후인 2008년 5월 벌어진 미국산 광우병 소고기 반대 촛불집회에 대한 보복 성격이라는 것이다. 석 달 동안 벌어진 촛불집회로 이명박 정부는 초기에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다. 결국 이 전 대통령은 국민에게 사과했고, 미국 정부와 소고기 수입 협상을 다시 해야 했다. 동시에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보복도 개시했다. 촛불집회의 배후가 노 전 대통령이라는 판단은 근거가 없었다. 그러나 직전 대통령선거에서 대패한 진보 진영이 이 일을 계기로 다시 결집한 것은 사실이었다.
문재인 청와대의 이철희 전 정무수석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적 목적으로 전직 대통령을 공격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명박 전 대통령은 광우병 소고기 시위로 큰 어려움을 겪자,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돌파구로 삼았다. 이로 인해 리더를 잃은 민주당과 노무현 지지자들의 감정이 격화됐다”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이 가장 먼저 벌인 보복은 대통령 기록물 유출 논란이었다. 2008년 6월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자신의 재임 동안 만든 대통령 기록물을 복사해서 경남 김해의 봉하마을로 가져간 일에 대한 수사였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까지의 대통령 중 가장 많은 기록물을 남겼고 관련 법률도 제정했으나, 자신의 선의에 발목 잡히고 말았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복사해온 기록물을 모두 정부에 돌려주고 이 일을 끝내려 했다. 그러나 이 일은 이 전 대통령이 벌인 정치 보복의 시작일 뿐이었다.
2008년 7월 국세청은 노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인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에 나섰다. 이어 검찰은 그래 12월 이 사건의 핵심 피의자인 박연차 회장과 노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를 구속했다. 수사는 노 전 대통령의 측근들을 거쳐 부인과 아들, 딸, 조카사위 등 가족으로 좁혀졌다. 노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30일 서울의 대검찰청에서 피의자로 조사받았다. 그리고 5월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말을 남기고.
이 사건은 검찰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 노 전 대통령은 검찰의 정치적 독립성을 보장하고, 검찰을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지 않음으로써 검찰을 개혁하려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정부 초기 ‘평검사와의 대화’에서부터 파탄이 났다. 검찰은 노무현 정부 초기 ‘대선 자금 수사’로 개혁을 면제받고 기득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자신들을 개혁 대상으로 여긴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깊게 감추고 있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민주화 이후 대통령과 검찰은 공생관계였는데, 노 전 대통령은 검경 수사권 조정을 추진하는 등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이에 대해 검사들은 노 전 대통령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건드렸고 그냥 둘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 감정이 노 전 대통령 수사에 반영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당시 한국에 큰 충격을 가져왔다. 500만 명 이상이 직접 문상했고, 영결식장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도 통곡했다. 이 사건은 단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진보-보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거대한 분노와 원한을 만들었다. 더욱이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가 된 직후부터 자신의 정당에서 배척받았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다수 야당의 탄핵을 당하는 등 끊임없는 고난을 겪었다. 그런 점에서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슬픔과 분노는 더욱 컸다.
노무현 정부의 성경륭 전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은 “현대사에서 엄청난 정치적 비극이었다. 많은 사람이 패닉에 빠졌고 상처받았다. 지지자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재까지도 책임자 가운데 누구도 사과하지 않음으로써 매듭이 풀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보수 진영에서 볼 때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비견할 만한 일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처럼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은 전통적 보수 지지자의 분노와 원한을 만들었다. 박 전 대통령은 단지 한 명의 보수 대통령이 아니라, 보수 진영의 대표자라고 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고 후계자였다. 그래서 보수 지지자의 충격은 더 컸다. 그 충격으로 등장한 것이 ‘태극기 집회’였다.
시위와 집회는 오랫동안 진보 진영의 일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을 시작으로 1980~1990년대 대학생·노동자의 시위와 집회는 모두 진보 진영이 주도했다. 2000년대 이후에도 2002년 효순·미선 참사 항의 집회,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2008년 미국산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집회, 2016~2017년 박근혜 탄핵 집회 등 주요 시위·집회들은 모두 진보 진영의 몫이었다. 물론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등장한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을 중심으로 한 보수 진영의 대규모 시위·집회도 간간이 열렸으나, 진보 진영과는 비교하기 어려웠다.
‘시위·집회는 진보가 주도한다’는 고정관념을 깬 것이 바로 박 전 대통령의 탄핵 반대를 위한 ‘태극기 집회’였다. 태극기 집회를 통해 보수 진영도 시위·집회의 주역으로 전면에 나섰다. 최초의 태극기 집회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진 직후인 2016년 10월31일 제이티비시(JTBC) 방송사 앞에서 열렸다. 이 집회는 박 전 대통령의 탄핵 반대에서 시작해 탄핵 무효 집회로 바뀌었다. 또 문재인 정부 시절엔 정부 퇴진 운동으로, 윤석열 정부 집권 뒤엔 정부 지지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상호 서원대 교수(정치학)는 “박 전 대통령이 탄핵당한 일은 보수 진영으로서는 박정희의 경제성장과 근대화 신화를 잃은 일이었다. 또 노년층으로서는 촛불 혁명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부정당한 느낌을 받았을 수 있다. 보수 진영이 그동안 자신들이 해오지 않았던 시위·집회에 뛰어든 것이 그런 이유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된 뒤 이 전 대통령도 무사하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원한을 한 몸에 받았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촛불집회가 주도했지만,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처벌은 검찰이 주도했다. 이 전 대통령은 주로 뇌물죄로 처벌받았지만, 많은 사람이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인지 이 전 대통령이 구속되고 중형을 선고받은 뒤에도 그를 옹호하는 시위·집회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문 전 대통령 집권 뒤 민주당의 맹렬 지지자들은 ‘문빠’ 또는 ‘문팬’이란 이름으로 뭉쳤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과 ‘태극기 부대’의 등장으로 위협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노 전 대통령을 향한 인사는 문 전 대통령에 대한 절대적 지지와 옹호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진보 진영 안에서도 문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금기시되다시피 했다. 문 정부를 비판한 진보 성향 언론사들도 문빠들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정치학)는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나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을 경험한 팬덤이 상대에 대한 적대감이나 증오를 키웠다. 그런데 이를 정치 지도자들이 해소하려 노력하기보다 오히려 키우는 방향으로 갔다. 결과적으로 팬덤이 위험한 방향으로 갔다”고 말했다.
2019년엔 보수-진보 양 진영의 증오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다.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의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가족에 대한 수사에 따른 집회였다. 검찰 수사가 부당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서울 서초동 검찰청으로 몰려갔고, 조 전 장관 가족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광화문으로 몰려갔다. 같은 문제를 두고 양 진영이 같은 날, 다른 장소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과 박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형성된 증오의 정치가 새로운 구도를 형성했다.
이 수사를 주도한 윤 전 총장의 대통령 당선은 증오의 구도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특히 대통령 당선 직후 시작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전방위적인 수사가 다시 증오의 정치를 불붙였다. 이 대표를 “중범죄가 확정적인 후보”라고 비난했던 윤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검경은 이 대표와 관련해 무려 10건의 수사를 벌였고, 현재 그중 3건의 재판이 진행 중이다. 윤 대통령은 ‘카르텔’이나 ‘전체주의’, ‘반국가세력’과 같은 극단적 표현을 써가며 야당과 진보 세력에 대한 증오를 감추지 않고 있다.
이철희 전 수석은 “윤 대통령은 대통령직인수위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실책을 했다. 그로 인해 지지기반이 좁아지니 이념을 앞세워 야당과 싸우고 있다. 이념주의자라기보단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념으로 포장하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이 대표에 대한 검경의 대대적인 수사는 이 대표의 2022년 5월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 출마와 2022년 7월 당대표 출마를 불러왔다. 문빠와 마찬가지로 이재명을 지키겠다는 맹렬 지지자들인 ‘개딸’(개혁의 딸들)이 등장했다. 윤 정부의 이재명 대표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로 민주당 안에서 이 대표에 대한 견제나 비판이 억제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2024년 벽두, 이 대표가 자신을 증오하는 여당 성향 한 시민으로부터 흉기로 공격당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증오의 정치’는 달라질 수 있을까? 정상호 교수는 “증오 정치의 역사나 현재의 팬덤정치, 소셜미디어 상황은 바꾸기 쉽지 않다. 정치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먼저 대통령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하고, 양당제 구조를 바꿔야 한다. 3~5당 정도의 온건 다당제로 바꾸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윤철 교수는 “시민들이 팬덤이나 소셜미디어에 휘둘리지 말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이 합의를 통해 문제를 풀도록 압박해야 한다. 선거제 개혁도 정치권이 아니라 시민의 참여와 주도로 제도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 상황을 정치권에 맡겨둬서는 어렵다”고 말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시사 오랑캐: 오랑캐처럼 자유로운 외부자의 눈으로 세상사를 봅니다. 4주에 한 번 연재.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정규재 “윤 대통령 과도한 알코올로 국정수행 불가능”
윤, 계엄 3시간 전 경찰청장에 ‘10곳 장악 리스트’ 건넸다
“까면 깔수록 충격” 국회 앞 시민들 커지는 분노
[단독] 한동훈, 이르면 오늘 ‘윤 탄핵 찬성’ 밝힐 듯
윤 대통령, 계엄날 안가로 경찰청장 불러 ‘10개 장악기관’ 전달
[단독] 윤, 조지호에 6차례 ‘의원 체포’ 지시…계엄 해제 뒤 “수고했다”
윤, 김용현·경찰 투톱과 안가 회동…군·경 동원 내란 기획
[단독] 방첩사, 계엄 날 경찰에 ‘국회의원 체포조 100명’ 파견 요청
신라왕실 연못서 나온 백자에 한글 ‘졔쥬’ ‘산디’…무슨 뜻
[단독] 김용현 “윤석열, 직접 포고령 법률검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