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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서둘렀다면

등록 2021-10-16 17:57 수정 2021-10-17 02:07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 세 모녀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김태현씨가 2021년 4월9일 검찰 송치 전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합뉴스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 세 모녀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김태현씨가 2021년 4월9일 검찰 송치 전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합뉴스

2021년 10월4일 서울 은평구에서 30대 남성 ㄱ씨가 공인중개사인 50대 여성 ㄴ씨를 살해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전세 사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추측성 보도가 나왔지만 사건의 발단은 ‘스토킹’이었다. 경찰은 ㄱ씨의 범행이 ㄴ씨의 딸 ㄷ씨와 온라인에서 벌어진 시비에서 비롯된 것으로 ‘계획범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ㄱ씨는 ㄷ씨의 인터넷 방송을 시청하며 욕설과 비방을 자주 해 ‘강퇴’를 당하고 그때부터 ㄷ씨를 스토킹한 것으로 알려졌다. 급기야 ㄴ씨 사무실 주소를 알아내 찾아가 범행을 저질렀다. 일주일 뒤인 10월12일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 세 모녀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받던 김태현(25)씨가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김씨는 온라인게임에서 만난 ㄹ씨를 스토킹하다 3월23일 ㄹ씨의 집을 찾아가 여동생과 어머니, ㄹ씨를 차례로 살해한 혐의를 받는다.

10월21일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된다. 국회가 조금만 서둘렀다면, 법이 빨리 시행됐다면 이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그동안 스토킹은 경범죄(지속적 괴롭힘)로 취급돼 가해자는 10만원 이하 벌금·구류 또는 과료 처분을 받았으나, 법이 시행되면 스토킹 행위를 지속한 가해자는 2년 이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분리조처, 접근 금지 등 경찰이 스토킹 피해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응급조처에 대한 법적 근거도 마련됐다.

스토킹처벌법은 ‘스토킹 행위’를 “상대방의 의사에 반(反)하여 정당한 이유 없이 상대방 또는 그의 동거인, 가족에 대하여 특정 행위를 하여 상대방에게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10월13일 경찰청 경찰소통포럼에서 발표된 ‘스토킹범죄, 이렇게 대응합니다’ 자료를 보면 ‘특정 행위’는 지속·반복적으로 따라가거나 지켜보기, 쪽지 등 물건을 남겨 공포심과 불안감을 야기하는 행위는 물론 온라인게임에서 공포심 유발, 주거지 주변에 물건 등을 두는 행위, 우편·전화 등을 통해 말, 영상, 그림 등을 보내는 행위를 포함한다. 경찰은 층간소음이나 흡연 시비 등으로 집 출입문에 협박성 문구를 담은 쪽지를 붙이는 일, 학부모가 교사에게 자녀와 관련해 지속해서 협박하거나 민원을 제기하는 일 등도 스토킹처벌법으로 처벌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법이 일상의 사적 관계에 과도하게 개입한다는 우려도 일부에서 하지만, 스토킹 범죄에 따른 수많은 희생자를 고려하면 법 시행은 늦은 감이 있다. 온라인 스토킹 행위가 다양해지고 있어 별도의 ‘온라인 스토킹 처벌법 제정’이나 보완 입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스토킹은 사건 피해 상담 204건의 21%가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위험한 범죄(‘스토킹의 개념과 처벌에 관한 몇 가지 제언’, 2017년)다. 그러나 스토킹처벌법은 1999년 제15대 국회를 시작으로 제21대까지 24건이 발의됐지만 좀처럼 통과되지 못하다 2021년 3월에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승준 <한겨레> 이슈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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