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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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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아들의 창조경제

등록 2013-06-16 18:34 수정 2020-05-03 04:27

올해 초 토요판에 ‘박근혜는 끝내 모피아를 버릴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박근혜 정부 초대 경제팀 진용의 윤곽이 드러나던 무렵이었다. 경제팀의 투톱이라 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현오석)과 청와대 경제수석(조원동) 내정자는 공교롭게도 모두 옛 경제기획원(EPB)에 뿌리를 둔 인물이었다. 실무진으로 내려갈수록 색채는 더욱 두드러졌다. 경제수석실 경제금융비서관과 국정기획수석실 기획비서관엔 각각 주형환 재정부 차관보와 홍남기 재정부 정책조정국장이 내정됐는데, 이들 역시 대표적인 ‘기획통’ ‘예산통’으로 꼽히던 인물이다. 이를 두고 당시 언론에서는 ‘모피아(재무부+마피아)의 몰락’과 ‘EPB의 부활’이라는 평가가 연일 쏟아졌다. 전임 이명박 정부 때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금융관료들의 위세가 다소 주춤한 반면, 박근혜 정부 초기 경제정책의 무게중심이 기획·예산 분야로 옮겨갔다는 게 지배적인 평가였다.
당시 칼럼에선 박근혜 정부 출범 시기의 여러 정황상 기획·예산 분야가 주목받을지는 모르나, 박 대통령이 끝내 모피아와 ‘단절’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언급한 것으로 기억난다. 설령 박근혜 정부가 모피아로부터 ‘독립’을 원한다손 치더라도, 아마 머지않아 굴욕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란 전망도 덧붙였다. 당시 이런 전망을 내놓으면서 나름의 근거로 든 것 중 하나가 박 대통령의 ‘금융관’이었다. 박 대통령의 기본적인 경제 인식 자체가 금융을 기껏해야 ‘종속변수’쯤으로 여기는 개발시대의 낡은 패러다임에 젖어 있는 한, 정부가 방향을 제시하고 지침만 내리면 민간 영역을 넘나드는 돈의 물꼬는 언제든 자유로이 통제·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판단에서다. 그 임무를 가장 탁월하게, 정교하게 수행해낼 수 있는 기술자가 바로 오랜 경륜과 넓은 인맥으로 무장한 금융관료들이다.
어느덧 박근혜 정부 출범 100일에 즈음해, 예의 그 금융관료들의 그림자는 갈수록 또렷해지고 있다. 행정부와 청와대의 울타리를 잠시 벗어나, 우선 민간 영역을 주무대로 삼은 게 이 정부 들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나 할까. KB금융지주(임영록)와 농협금융지주(임종룡) 신임 회장 자리는 보란 듯이 나란히 전직 고위 금융관료 몫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 모두 금융 분야의 핵심 부서인 금융정책국을 거쳐 재정부 차관을 지낸 인물이다. 지난 정부에선 금융권 ‘천왕’의 자리를 주로 최고권력자의 핵심측근 인사들이 꿰차는 모양새였다면, 이 정부 들어선 금융관료가 별다른 경쟁자 없이 독주하는 구도가 형성되는 꼴이다.
문득 친분이 있던 한 전직 고위 관료와 얼마 전 점심때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씁쓸하다. 이 전직 관료는 한 금융유관기관의 장을 맡고 있는데, 속된 말로 약간 ‘급’이 떨어지는 자리였다. 차관급까지 지낸 이 인사는 내심 그 자리가 못마땅해 보였다. 애초 그 자리가 공석이 됐을 때, 뜻밖에도 선뜻 나서는 지원자가 없었단다. 정권교체기를 맞아 ‘큰 장’(!)이 설 것이란 기대감에 전·현직 금융관료들은 일단 ‘통과’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모피아와는 전혀 거리가 먼, 다른 금융기관 출신 인사가 분위기 파악을 못한 채 그 자리에 잠시 관심을 가졌다. 이내 모피아 그룹 내부에선 잠시 소동이 벌어졌단다. 아무리 힘이 약한 협회장 자리일지언정, 재정부 출신이 아닌 인사에게 ‘넘겨준다’는 건 전례가 없을뿐더러 조직의 위상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논리였다. 후배들은 선배에게 자리를 ‘맡아달라’며 사실상 강권(!)했고, 결국 이 인사는 그 자리의 주인이 됐다.
사실 더 볼썽사나운 건 민간 금융기관을 ‘접수’하는 모피아보다, 정작 그들을 대하는 금융회사들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모피아 회장을 반대한다’며 노조가 나서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이를 바라보는 세간의 눈길이 그다지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게 현실이다. 그간의 경험에 비춰볼 때, 모피아이건 권력자의 측근이건 간에 ‘힘깨나 쓰는’ 인사라야 오히려 조직엔 도움이 된다는 게 민간 금융기관 구성원들의 속내에 더 가까운 탓이다.
금융가에선 너나없이 ‘창조금융’ 열풍이 한창이다. 모피아와 금융회사(시장), 여기에 정치권의 이해관계까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그 황금의 조합은 과연 무엇을 ‘창조’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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