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uns of August), 바바라 터크먼이 1962년에 지은 책이다. ‘엇갈린 의도와 오해, 그리고 부주의’로 1914년 8월, 전쟁이 시작됐다. 1차 세계대전은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케네디 미 대통령은 쿠바 미사일 위기에 직면했을 때, “나는 훗날 ‘10월의 미사일’ 같은 책을 쓰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반도에서 한국전쟁 이후 전쟁의 문턱까지 가장 가까이 갔던 시점은 1994년 6월이다. 윌리엄 페리 미 국방장관도, 로버트 갈루치 협상대표도 당시 1914년의 여름을 늘 생각했다고 회고한다. 남북관계가 말싸움의 단계를 지나 본격적인 주먹다짐으로 넘어가려는 현재의 시점에서 1994년 6월을 기억해보고자 한다. 무능과 오기로 원치 않은 ‘총성’을 들을 뻔했던 경험을 다시 떠올려본다.
1994년 6월, 그때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정책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출판한 책들도 적지 않다. 그중에는 우리의 익숙한 기억과 다른 것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김영삼 대통령의 회고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하고 그때 대판 싸웠습니다. 그때 내가 싸우지 않았다면 아마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거예요.” 이 말은 이후 ‘한국도 모르게 미국이 전쟁을 검토했다’는 기억을 만들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의 말은 거짓이다. 갈루치를 포함한 당시 클린턴 행정부의 핵심 당국자들이 쓴 책에는 이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가 나와 있다. 전쟁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그해 6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과 통화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김영삼 대통령의 그런 말에 얼마나 열받았으면, 백악관의 통화 기록을 다시 뒤져보았겠는가. 그리고 이들은 덧붙인다. “북한에 대한 제재를 시종일관 밀어붙인 것은 김영삼 대통령 자신이었고, 한국은 미국의 군사력 증강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있었다.”(, 조엘 위트·대니얼 폰먼·로버트 갈루치 지음)
그때 전쟁으로 몰아간 것은 김영삼 대통령의 무능과 대북 강경파들의 오기였다. 미국에서 군사적 선택은 협상을 통한 해결 가능성이 멀어졌을 때 논의되기 시작했다. 누가 협상의 길을 막아섰는가. 김영삼 정부의 책임이 크다. 한-미 관계에서 ‘한바탕 소동’으로 기록된 1993년 11월 한-미 정상회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자리에서 한-미 양국의 외교 실무자들이 합의한 ‘포괄적 접근 방안’을 김영삼 대통령은 현장에서 뒤집었다.
우여곡절 끝에 북한과 미국은 다시 대화를 시작했고, 1994년 2월18일 이른바 ‘슈퍼 화요일 합의문’을 만들었다. 그해 3월1일 화요일을 기해 팀스피릿 훈련 중단,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남북 특사 교환, 그리고 3월21일 북-미 회담 개최를 동시 발표하자는 묘안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이후 어떻게 대응했는가. 특사 교환을 위한 남북 대화를 북-미 회담 이전에 반드시 해야 한다는 고집을 부렸다. 남북한의 상호 불신이 여전한 상황에서 남북 대화를 북-미 대화와 연계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화가 제대로 되겠는가. 3월19일 ‘불바다’ 발언은 어쩌면 예고된 사건이었다. 박영수 북쪽 회담 대표는 송영대 남쪽 대표에게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결코 그쪽이 전쟁을 강요하는 데 대해서는 피할 생각이 없다. 전쟁의 효과에 대해서 송 선생 쪽에서 심사숙고해야 한다.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만다”고 말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왜 그동안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던 남북회담의 실제 화면이 공개됐을까. 일반적으로 판문점 남북회담은 비공개다. 다만 청와대와 관련 부처는 회담 내용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다. 북쪽 지역 통일각에서 회담이 있을 때는 화면 없이 말소리만 들을 수 있다. 남쪽 지역인 평화의 집에서 할 경우엔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통해 목소리뿐 아니라 화면도 볼 수 있다. 마침 문제의 ‘8차 접촉’은 평화의 집에서 열렸다. 오후 2시께 통일원 관계자가 녹화 테이프를 주면서 9시 뉴스에 나올 수 있는지를 방송사에 물었다. 회담이 끝난 지 3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곧이어 54분의 회담 내용 중 가장 자극적인 2분40초 분량의 테이프가 방송사로 넘겨졌다. 방송사는 이 중에서도 반말이 섞인 격앙된 1분을 편집해서 내보냈다.
비공개 남북회담 편집해 방송 내보내그것으로 ‘슈퍼 화요일’의 합의는 붕괴했다. 3차 북-미 회담도 날아가버렸다. 그렇게 협상 국면은 시작되지도 못한 채 끝이 났다. 북한은 5월4일 영변의 원자로에서 연료봉을 추출하기 시작했다.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 생산을 시작한 것이다. 미국에서 군사적 해결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5월19일 존 섈리캐슈빌리 미 합참의장이 한반도 전쟁 시나리오를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군 3만 명, 한국군 45만 명, 민간인 100만 명이 죽거나 다치고, 600억달러의 전쟁 경비가 들고, 한국 경제의 피해 규모는 1조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됐다. 전쟁이 일어나면 당연히 한-미 양국이 승리한다. 그러나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 말은 “수술은 성공한다. 그러나 환자는 죽는다”는 뜻이었다. 5월을 넘기며 사실상 미국에서는 전쟁을 피하기 위한 방안들이 구체적으로 검토됐다.
물론 6월13일 북한이 IAEA를 탈퇴했을 때, 선제공격설이 거론된 적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과의 협의를 전제했다. 그것도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회담으로 취소됐다. 북한이 IAEA를 탈퇴하던 날 오후에 카터 전 대통령이 서울에 도착했다. 방북을 성사시킨 것은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 대사였다. 그해 5월 국회에서 국방부 장관이 한-미 연합군의 전쟁 계획을 상세히 밝힐 때, 레이니 대사는 미 조지아주로 달려가 오랜 친구인 카터 전 대통령에게 부탁을 했다. ‘제2의 한국전쟁’을 막는 데 앞장서달라고. 카터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를 마다하지 않았을 때, 김영삼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해서 ‘카터의 방북은 실수’라고 비난했다. 미국은 카터의 방북을 내켜하지 않았지만, 결국 카터-김일성 회담 결과를 협상 국면으로 전환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김영삼 정부는 위기관리 능력도 없으면서 위기를 부추겼다. 그런 점에서 6월14일부터 16일까지 사흘간 한국 사회를 휩쓴 사재기 열풍은 ‘만들어진 공포’였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영동백화점에서 하루 30상자씩 팔리던 라면이 14~15일 이틀 동안 200상자가 팔렸다. 그 사흘 동안 전국적으로 팔린 라면은 모두 5400만 개였다. 사람들은 현금을 비축하기 위해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입했다.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단지 부근의 한 은행에서는 평소 3만달러 정도에 불과하던 환전 규모가 14일 5만달러, 15일엔 12만달러로 크게 늘어났다.
‘불바다 발언’ 때도 그런 움직임은 없었다. 아니, 일주일 전까지도 그렇지 않았다. 현충일 연휴였던 6월5일과 6일에는 휴가 인파로 고속도로가 정체되기도 했다. 안보불감증에 걸려 보수파들을 애타게 만들었던 시민들이 왜 옷 사러 백화점 갔다가 라면을 샀을까?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는가? 방송과 언론이었다. 보수 언론들은 일제히 국민들의 안보불감증을 질타했다. 방송에서는 특집으로 전쟁 가능성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일전불사 각오도 쏟아져나왔다. 이홍구 당시 통일원 장관은 6월7일 민주평통 서울지역 회의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북한의 전쟁 기도를 응징할 것”이라는 결의를 밝혔다. 6월8일에는 김영삼 정부 취임 이후 처음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소집됐다. 이날의 회의 주제는 가상전쟁에 대한 도상연습이었다. 거리에는 한동안 보이지 않던 ‘멸공 차량’이 등장해서 ‘잊지 말자 6·25’를 떠들기 시작했다. 카터 전 대통령이 휴전선을 넘던 6월15일 실시된 민방위 훈련은 2년6개월 만에 ‘전시 대비 훈련’으로 전환됐다.
김영삼 정부는 협상의 길목을 차단하면서, 북핵 문제를 위기의 길로 몰아갔다. 성숙한 국민의식을 안보불감증으로 몰아세웠고, 결과적으로 사재기를 부추겼다. 나비효과처럼 번져가던 불안 심리를 잠재운 것은 카터의 방북 효과였다.
위기를 다룰 때는 길고 넓게 봐야 한다. 핵심은 안보 불안이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다. 1999년과 2002년 서해에서 교전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금융시장에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일시적이었다. 국민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안보불감증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외국인 투자자나 일반 국민들은 위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알았다. 김대중 정부의 위기 수습 능력을 신뢰했기 때문에 동요하지 않은 것이다.
15년 전 악몽이 떠오르는 이유물론 한국 경제에서 북핵 문제나 남북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2003년 2월 초 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사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두 단계나 하향 조정한다고 발표했다. 유일한 이유는 ‘북한의 행동 및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과 관련한 불확실성’이었다. 통상적으로 국가신용등급을 1단계 조정하면 차입금리가 0.35% 높아지고, 연간 차입비용 증가는 5억달러에 이른다. 반대로 2005년 7월과 10월에는 6자회담 진전 상황을 고려해 피치사와 S&P가 신용등급을 1단계 상향 조정하기도 했다.
2006년 북한 핵실험 때, 한국의 보수 신문들은 일제히 국민들의 안보불감증을 질타했다. 는 그해 10월10일치 사설에서 “북한 핵무기에 대한 공포가 금융시장을 덮치고 실물경제로 쏟아져 한국 경제의 목을 조이는 사태로 몰려올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사재기는 없었다. 주가도 이틀 만에 안정세를 되찾았다. 국민은 성숙한데, 색깔에 눈먼 사람만 흥분했다.
최근 한반도 정세가 심상치 않다. 북한이 주장하는 인공위성이 3월 하순에 발사되면, 위기는 고조될 것이다. 정부는 일전불사를 외치기 전에 위기 예방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경제가 어렵다. 환율이 요동치고 있다. 1994년 6월처럼 강남 부자들이 달러 사재기에 나서면 어떻게 될까. 이미 15년이나 세월이 흘렀다. 그래도 자꾸만 1994년 6월의 악몽이 생각난다. 지나친 기우일까.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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