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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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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하다 나오는 게 사과

등록 2008-08-14 00:00 수정 2020-05-03 04:25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을 보는 듯한 금강산 총격 사망, ‘남북 유감 표명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사과는 진심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그래야 사이가 좋아진다. 마지못해 사과할 수 있다. 받는 사람의 체면은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사이가 좋아지지 않는다. 금강산에서 관광객이 북한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북한의 과잉 대응이다. 금강산 관광은 중단되고, 정부는 북한의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하고 있다. 과연 이명박 정부가 북한의 사과를 받아낼 수 있을까? 그동안 남북관계의 역사에서 서로 사과한 사례가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해법이 보이지 않을까?

사과하되 사과하지 않는다

미국이 북한에 사과했다. 1968년 1월23일 미국의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에 나포됐다.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경악했다. 베트남으로 향하던 핵항공모함의 기수를 동해로 돌리고, 일본과 태평양 공군기지의 전폭기 38대를 오산과 군산의 공군지지로 이동시켰다. 군사적 힘을 동원해서 겁을 줄 생각이었다. 효과가 없었다.

북한은 82명의 승무원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존슨 행정부는 결국 협상을 선택했다. 베트남전쟁은 수렁에 빠졌고, 미국 내 반전운동도 활발해지던 시절이었다. 바야흐로 ‘68세대’가 거리를 휩쓸던 시대였다. 두 개의 전선은 불가능했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북-미 직접 협상이 시작되고, 11개월 동안 29번의 비공개 회의가 열렸다. 북한은 미국에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사과문에 서명하고 승무원을 돌려받든지, 아니면 승무원들이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인지. 북한이 제시한 사과문에는 영해 불법 침입과 정탐 행위에 대한 엄숙한 사과, 그리고 재발 방지에 대한 약속이 들어 있었다. 미국이 받기 힘든 내용이었다.

당시에도 이념적 근본주의자들이 있었다. 반공을 종교처럼 믿는 사람들은 협상을 반대했다. 하지만 승무원의 목숨을 살려야 될 것 아닌가? 외교적 체면 손상을 최소화하면서, 승무원을 살릴 방법. 그것이 문제였다. 국무부에 근무하던 한국계 직원의 부인이 묘수를 냈다. 북한이 작성한 사과문에 서명하는 대신 그 직전에 구두로 ‘사과’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자는 계획이었다. 북한은 이 제안을 받았다. 사과문이 공식 문서로 남는 것이지, 구두 부정은 무시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사과문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근거를 남기고 싶었다. 절묘한 타협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12월23일 미국 대표 우드워드 소장은 ‘사과’ 문건에 서명하기 직전 “이 문건에 서명하는 유일한 이유는 인도적 견지에서 승무원을 돌려받기 위해서이지 북한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사과문의 내용에 (동의해) 서명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그러고 나서 서명했다. 이후 82명의 승무원은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한 구의 주검과 더불어.

물론 당시 푸에블로호는 돌아올 수 없었다. 그것은 북한 외교의 전리품으로, 현재 평양의 대동강에 전시돼 있다. 1998년 말에 원산의 해군기지에서 대동강으로 옮겼다고 한다. 푸에블로호가 전시된 곳은 1866년 제너럴셔먼호가 불탔던 바로 그 자리다. 반미의 상징물이다. 그런데 최근 푸에블로호 반환 논의가 있다. 달라진 북-미 관계를 반영한다. 2002년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요청한 이후, 최근 북-미 관계가 활성화되면서 좀더 진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푸에블로’는 콜로라도주의 도시 이름이다. 콜로라도주는 비운의 배를 반환받으면, 이를 이용해 공원을 만들 계획이다. 북-미 냉전의 상징이 과연 화해의 상징이 될 수 있을까?

매달렸으나 “골치 아픈 한국 정부”라는 말만

남쪽도 북에 사과한 적이 있다. 2003년 8월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렸다. 북한의 참여 여부가 중요했다. 그러나 8·15 행사에서 보수단체가 인공기를 소각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북쪽은 남쪽의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1차 6자회담을 앞둔 민감한 시기였다. 노무현 정부의 입장에서 소강상태의 남북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대구의 기대감도 작용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부 차원의 유감 표명’을 지시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통일부는 자체적으로 ‘유의’라는 표현으로 전화통지문을 보냈다. ‘그 정도면 되겠지’라고 판단했다. 체면도 고려했다. 그렇지만 판단 착오였다. 북한의 반응은 냉랭했다. 부족하다는 것이고, 그 정도로 북한 내부의 강경파를 설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할 수 없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 유감을 표명해야 했다. 국내적으로 논란이 있었지만, 보수의 도시 대구가 얻을 실익이 체면보다는 컸다.

그러면 북한의 사과를 받아낸 경우를 살펴보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5월 방북했을 때, 김일성 당시 수상은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그는 “청와대 사건이든가,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께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내부의 좌경 맹동분자들이 한 것입니다. 그때 나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보위부, 참모장, 정찰국장 다 철직(파면)시켰습니다.”

대화가 이뤄지면, 자연스럽게 사과를 받을 수 있다. 반대로 대화가 없으면 사과를 받아내기 어렵다. 1996년 9월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북한은 사건이 일어난 지 6일 만에 ‘우발적 사고’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처음부터 의도적’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강경 정책을 선택했다. 대북 지원을 중단했고, 기업인의 방북을 금지했으며, 남포공단의 대우 직원을 철수시켰다. 권오기 통일부 장관은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소용이 없자, 국제공조에 매달렸다.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북한의 행위를 규탄했으며, 안보리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물론 한-미 공조도 추진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매달렸지만 미국은 달랐다.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1996년 9월19일 “모든 당사자들이 추가적 도발 행동을 말아주기를 촉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해 11월19일 는 “국무부 직원들이 한반도에서 가장 골치 아픈 존재는 한국 정부라고 생각한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한-미 관계는 최악의 상태였다.

최근 금강산 사태 이후 벌어진 상황은 12년 전의 재방송을 보는 듯하다. 금강산 사건 이후 대북 지원 검토는 없었던 일이 됐다. 민간교류는 정부가 나서 말리고, 국제공조에 매달리고 있다. 통일부의 최고 당국자는 “후회하게 만들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렇게도 비슷할까? 미국 대선을 앞둔 상황이고 한-미 양국의 대북정책 목표가 다르다는 사실까지도.

연평해전과 2002년 관광객 억류사건의 차이

결과도 보인다. 1996년 11월 대선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 선거 직후 빌 리처드슨 의원이 특사 자격으로 방북해 강석주 등을 만났다. 선거 국면에서 주춤했던 북-미 관계를 다시 진전시키기로 공감대를 모았다. 북한 외교부와 미국 국무부는 직접 협상을 시작했다. 3주간의 실무 협의 뒤, 북한 외교부는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1996년 9월 강릉 잠수함 사건에 대하여 깊은 유감을 표시하며,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남쪽에 대한 직접 사과는 아니었다. 석 달 만의 사과, 그러나 남북관계는 달라지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비난은 계속됐고, 이미 죽은 남북관계는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는 넓고 길게 보지 못했다. 대책 없는 강경 정책으로 일관성을 상실했고, 북한과 미국에 대한 정부의 신뢰만 추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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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와 유감 이명박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8월6일 오전 청와대 녹지원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이날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했지만, 미국이 북한의 사과를 대신 받아줄 순 없는 일이다. (사진/REUTERS/ 이재원)

어떻게 하면 진정한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1999년과 2002년의 연평해전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1999년의 경우를 살펴보자. 6월15일 연평해전이 발생했다. 북한의 어뢰정 1척이 침몰했고 경비정 1척도 침몰 직전 도주했다. 북쪽은 3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남쪽의 피해는 경미했다. 6월22일 베이징에서 차관급 회담이 열렸을 때, 북한은 ‘무장도발’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 ‘담보’를 요구했다. 남쪽이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였다. 회담은 결렬됐다. 물론 당시 정부는 금강산 관광선 출항을 허가했다. 서해에서는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는데도 말이다. 이런 판단은 현대를 통해 북한의 의사를 확인했기에 가능했다. 북쪽은 서해 사태에도 금강산 관광 사업이 정상적으로 추진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며칠 뒤인 6월21일에 발생한 금강산 관광객 억류사건은 달랐다. 정부는 즉각 금강산 관광을 중단했다. 다행히 나흘 만에 억류됐던 민영미씨는 풀려났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관광객 신병안전보장 조치가 선행되지 않으면 관광을 재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관광세칙을 합의하고, 신변안전조치를 마련하며, 남북조정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요구했다. 미흡하지만 이런 조건이 충족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금강산 관광선은 45일 뒤인 8월5일부터 다시 출항할 수 있었다.

2002년 6월 2차 연평해전의 사례는 더욱 확실하다. 6월29일 북한 해군 경비정은 기습적으로 함포사격을 가해 남쪽 해군 고속정이 침몰했다. 6명이 전사했고, 18명이 부상을 당했다. 북쪽은 즉각 핫라인을 통해 “현지 아랫사람들의 우발적 사고이며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다시는 이러한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해왔다. 핫라인은 2000년 정상회담 이후 개통된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핫라인을 통해 답신을 보냈다.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하며, 동시에 책임자 처벌과 재발 방지도 요구했다. 7월25일 북한은 통일부 장관 앞으로 전화통지문을 보내 ‘유감’을 표명했다. 남북 장관급 회담은 재개될 수 있었다.

국제공조는 해법이 아니다

대화가 이뤄져야 사과도 받을 수 있다. 핫라인이 가동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최소한 비공개 남북대화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렵다. 국제공조, 그것은 해법이 아니다. 미국에 매달린다고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남쪽의 체면을 살려줄 수는 있다. 그러나 당사자의 노력이 없으면 북한이 마지못해 사과를 해도, 남북관계는 달라지지 않는다. 사과를 받는 목적이 무엇인가? 사이가 좋아지기 위해서다. 마음이 있으면 방법은 찾을 수 있다. 그럴 마음이 있느냐,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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