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의 미국, 한국의 진보에게는 ‘희망’이고, 보수에게는 ‘절망’이다. 엇갈림, 운명의 장난일까? 네오콘(뉴라이트)은 미국에서 패배했지만, 한국에서 본격 활약 중이다. 시대에 역행하는 자들은 역사의 기차가 굽잇길을 돌 때 떨어져나간다. 대북정책은 어떤가? 남북 관계는 멀어지고, 북-미 관계는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면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 갈등이 발생한다. 마치 영화의 속편처럼, ‘엇박자 대북정책 2’의 개봉이 임박했다.
노태우 정부, ‘능동외교’가 시작되다남-북-미 삼각관계의 시작은 미국이 북한과 접촉을 하면서부터다. 북-미 양국의 첫 번째 만남은 1992년 1월 뉴욕에서였다. 아널드 캔터 미 국무부 정무차관과 김용순 북한 노동당 비서가 그때 만났다. 김용순은 며칠 뒤 이렇게 말했다. “칼에는 칼, 떡에는 떡, 이제는 칼을 내려놓고 떡을 집어들 때다.” 그때는 남-북-미 삼각관계가 선순환했다. 북-미 접촉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과 긴밀하게 협의했다.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 관계에서 노태우 정부 시기는 한국이 주도하고 미국이 따라왔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북방외교’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외교’가 그때부터 시작됐다. 유엔 무대에서 미국을 따라 하던 수동 외교가 아니라, 능동 외교 말이다. 노태우 정부의 자신감에는 남북 관계가 있었다. 남북한은 1990년 9월 남북 고위급 회담을 시작했다. 미국에 대해 남북 주도 원칙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1991년)도 사실은 미국의 요청이 있었지만, 형식은 한국 주도였다. 노태우 정부는 당시 “북핵도 남북 문제이므로 한국이 주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남북 간에 핵통제위원회를 가동했다. 1991년 11월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이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주변 4개국이 참여하는 ‘2+4 회의’를 제안했을 때, 노태우 정부는 거부했다. 한국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한국의 의견을 듣고 베이커 장관은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물론 노태우 정부 말기에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갈등이 벌어졌고, 김영삼 후보와 가까웠던 대북 강경파들이 ‘훈령조작 사건’ 등을 주도하면서 ‘자주적 대북정책’은 사그라졌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엇박자’의 드라마는 시작되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자주 보게 될 풍경이리라. 당시 빌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에 대해 외교를 했고, 김영삼 정부는 미국에 대해 정치를 했다. 그때,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을 나타내는 유행어는 ‘혼선’이었다. 1993년 11월 한-미 정상회담 때의 일이다.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을 위해 ‘포괄적 접근’(Comprehensive Approach)을 준비했다. 북핵 해결과 북-미 관계 정상화를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이고, 당장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아들이면 북한이 원하는 팀스피릿 군사훈련 중지가 가능하다는 일괄타결(Package Deal) 방안이었다. 미국 국가안보회의(NSC)와 국무부는 한국 쪽 담당자들과 충분히 의견을 조율했다. 그러나 다음날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경악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은 실무협의 결과와 정반대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포괄적 접근을 반대한다”는 말로 회담을 시작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설명을 김 대통령은 아예 들으려 하지 않았다. 황당해진 앤서니 레이크 국가안보보좌관은 사전협의 상대였던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을 쳐다보았다. 정 수석도 참담한 표정이었다. 난감해진 클린턴 대통령은 어찌할 바 몰라하는 한-미 양국의 두 보좌관에게 다른 표현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철저하고 광범위한(through and broad) 접근’이다.
새벽 2시에 국무장관이 전화를 건 이유외교 관례를 벗어난 돌출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그 전날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에서 한국의 대책회의가 있었다. 한승주 당시 외무장관은 그 자리에 유종하 유엔대사가 참석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를 부른 것은 박관용 비서실장이었다. 한승주 장관이 미국과 사전 협의한 포괄적 접근을 설명하자, 유종하 대사는 반대했다. 팀스피릿 훈련 중단을 IAEA 사찰이 아니라 남북 상호 사찰에 연계해야 한다는 강경 주장을 폈다.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 차관보는 “유종하 대사는 그 전에도 대북 강경 주장을 비밀리에 청와대에 보내곤 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조엘 위트·대니엘 폰먼·로버트 갈루치, 134~135쪽). 정상회담에서 나온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은 그 전날 유종하 대사의 주장이었다. 유종하 대사는 이명박 정부 외교안보팀의 좌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1편의 등장인물들이 계속 출연하는 명실상부한 ‘연속극’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첫 번째 한-미 정상회담 결과에 만족했다. 그는 과거 대통령 중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했다. 미국 대통령에게 반대한 것이다. 그 점을 그는 자랑스러워했다. 물론 미국의 고위 당국자들은 동맹국인 한국의 예측 불가성에 좌절하고 또 실망했다.
이후로도 갈등은 주기적으로 발생했다. 그러나 이런 갈등은 1994년 제네바 합의 채택 막판에 벌어진 해프닝과 비교해보면 소소하다. 1994년 10월8일자 김영삼 대통령의 기자회견 사건은 그 절정이다. 신문이 나오자 그날 영국을 방문 중이던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한승주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클린턴 대통령의 분노를 전달했다. 한국 시각으로 새벽 2시였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의 조기 붕괴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북-미 협상에 반대하고, 미국의 유화적 태도가 북한 정권을 연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미국에 직격탄을 날렸다. “미국이 북한에 속고 있다!” 그 발언에 클린턴 대통령과 미국의 당국자들은 분노했다.
며칠 뒤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 대사는 기자들의 눈을 피해 청와대 후문으로 들어가 김영삼 대통령과 면담했다. 미국의 분위기를 전하고 나오면서 간절하게 요청했다고 한다. 제발 일관성을 유지해달라고, 여론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김영삼 대통령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 초조했을 것이다. 남북 관계는 악화되고, 북한의 비난은 변함이 없는데, 북-미 관계만 풀리면 한국은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은 경수로 제공을 협상 수단으로 삼아 제네바 합의문에 반드시 ‘남북 대화’를 집어넣으려 했다. 한국의 협조가 필요했던 미국은 남북 관계를 집어넣기 위해 ‘벼랑 끝 협상’을 감수했다.
북한은 완강했다. 북한의 협상 대표였던 강석주는 갈루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북 대화라는 말을 다시는 하지 마라. 북-미 합의 속에 남북 관계를 언급할 자리는 없다.” 미국의 협상대표들은 남북한의 적대감에 난감했다. 김영삼 정부는 노태우 정부처럼 직접 평양으로 가면 되지, 왜 워싱턴의 발목을 잡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결국 협상 결렬을 감수하겠다는 미국의 단호한 입장으로 애매한 문장 하나가 어색하게 합의문에 들어갔다. 번역해보면 “북한은 제네바 합의가 남북 대화를 촉진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면 남북 대화에 참여할 것이다.” 물론 그 뒤로도 오랫동안 남북 대화는 없었다. 남북 관계에서 ‘공백의 5년’은 다른 말로 한-미 갈등의 역사였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한-미 양국은 공동 보조를 취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은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당시 진퇴양난이었다. 공화당이 주도하는 의회는 대북정책의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면서, 1999 회계연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예산 전액을 삭감하려 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북한에 중유를 줄 수 없게 된다. 제네바 합의가 깨지는 위기 상황이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결국 공화당 강경파가 신뢰할 수 있는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선택했다. 페리 조정관이 서울을 방문해서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과 김대중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한반도의 냉전이 끝나야 북핵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페리 조정관은 처음에 ‘한심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른바 ‘페리 보고서’가 의회에 제출할 때까지 임동원 수석은 그를 일곱 번 만났다.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페리보고서는 한국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했다. 페리 조정관은 나중에 자신의 보고서를 ‘임동원 보고서’라고 해도 좋다고 말한 적도 있다. 1998년 6월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대북정책의 핸들을 한국에 넘기겠다고 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물론 2000년 북-미 양국의 뜨거웠던 접촉은 지속되지 못했다.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했기 때문이다.
포괄적 접근의 결정적 걸림돌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포괄적 접근’이다. 한-미 갈등 때문에, 혹은 미 민주당의 대선 패배로 실현되지 못했던 이 구상이 이제는 가능할까? 오바마 팀의 적극적 대북 협상 의지는 미국이 처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의 세기가 저물어가고,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의 장기 전환이 시작됐다. 전환기 미국 외교안보의 핵심 과제는 핵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방지다. 오바마 팀은 북핵 문제를 세계적 비확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전선’(Front Line)으로 보고 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해서 중동과 제3세계의 핵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다. 이미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비롯한 공화당의 현실주의자들도 공감하고 있다. 포괄적 접근에 대해 미국 내부의 초당적 합의도 가능한 상황이다. 결정적 걸림돌은 한국의 보수 정부다. 이명박 정부 안에는 ‘김영삼의 길’을 가야 한다는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오바마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와 다르다. 좌절하고 실망하면서도 어떻게든 한국의 협조에 매달리던 힘없는 클린턴 행정부가 아니다. 오바마 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낡은 패러다임으로 설득하겠다는 생각, 버리는 게 좋다. ‘엇박자 대북정책 2’, 재미없다. 그리고 식상하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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