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단(舞水端), 바닷물이 춤추는 해안 절벽이라고 했던가. 칠보산의 해안가, 한반도에서 가장 긴(62km) 풍광 좋은 해안 단층대로 유명한 곳, 북한 천연기념물 제312호인 그곳이 다시금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지구촌의 내로라하는 언론들이, 힘깨나 쓰는 국가들이 무수단에서 눈을 떼지 못한 이유가 어디 아름다운 풍광 때문이겠는가. 남쪽 사람들이 정규 방송이 중단되고 갑자기 등장한 화면에서 본 것이 어디 ‘무수단의 용솟음치는 파도’였겠는가. 우리가 본 것은 ‘불을 품으며 하늘을 나는 로켓’이었다.
풍광 좋은 해안단층대가 긴장의 핵으로해안 절벽을 넘어 분지로 둘러싸인 곳에 북한의 미사일 기지가 있다. 갈대가 많아 ‘갈골’로 불렸던 로동(蘆洞)과 큰 갯가 마을이어서 ‘큰 개치’라고도 불렸던 대포동(大浦洞)은 1950년대 행정구역 개편 때 무수단리에 편입됐다. 이런 동네 이름이 무수단 하늘 위로 올라가는 미사일의 이름이 됐다. 2009년 4월 또다시 ‘무수단의 거친 파도’가 동북아에서 일고 있다. 1998년과 2006년에 이어 세 번째다. 냉전시대 미사일의 정치경제학을 살펴보면서, 출렁이는 정세가 나아갈 길을 생각해본다.
1957년 10월4일 저녁, 역사는 그날 이전과 그날 이후를 구분한다. 우리는 그날 이후를 ‘우주 시대’라고 부른다. 그날 소련 카자흐공화국의 튜라탐 근처 사막에서 ‘스푸트니크’(Sputnik·러시아어로 ‘위성’이라는 뜻)가 우주를 향해 불을 품으며 날아갔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당시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소련에 축하를 건넸다. 그러나 미국 시민들은 달랐다. 그날 밤 민주당 소속의 미시간 주지사 매넌 월리엄스는 이런 시를 썼다. “오, 하늘을 높이 나는/ 소련제 작은 스푸트니크여/ 너는 말하지/ 빨갱이 하늘(Commie sky)이 됐어/ 그런데 샘 아저씨(Uncle Sam·미국)는 잠자고 있네”
훗날 대통령이 되는 린든 존슨 상원의원도 텍사스에서 라디오를 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고 한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하늘이 참으로 낯설게 보였다”고 회고록에 썼다.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의 나라, 그렇지만 동시에 토머스 에디슨과 헨리 포드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에게 그것은 ‘진주만 공습’에 버금가는 충격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날 밤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미국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날 밤은 러시아에 뒤처졌다는 낭패감, 따라잡아야겠다는 초조감, 하늘에서 핵폭탄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감이 뒤섞인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스푸트니크의 밤’이 지나자, 냉전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했다. 미사일 경쟁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사실 스푸트니크 발사 직전까지도 미국에서 과도한 군사비 지출은 논쟁거리였다. 1959년에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군사비 증액을 거부하면서, 그렇게 하면 미국이 ‘병영국가(Garrison State)가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나아가 그는 1961년 1월 퇴임사에서 ‘역사에 남을 경고’를 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이끌었던 2차 세계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는 ‘막대한 규모의 군사시설과 방대한 무기산업의 결합’이 가져올 위험을 경고했다. 그리고 이날 그가 처음으로 사용한 단어가 있다. 그 유명한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다. 그는 미국의 안보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거대한 군산복합체’에 맞서 싸울 것을 호소했다.
소련의 위성 발사를 군비확장에 이용한 미국그러나 이후 미국의 역사는 ‘아이젠하워의 경고’를 무시했다. 스푸트니크의 밤, 그날의 ’충격‘에 사로잡힌 미국 사람들에게 그런 경고는 ‘순진한 노인의 마지막 노래’쯤으로 여겨졌다. 나아가 미국의 민주당은 시민들의 ‘충격’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소련에 패배한 무능한 지도자로 비판하면서 ‘잠자는 엉클 샘’을 자극했다. 존 F. 케네디는 ‘스푸트니크 충격’ 속에서 이른바 대륙간탄도유도탄(ICBM) 분야에서 미국이 소련에 지고 있다는 ‘미사일 격차’(Missile Gap) 문제를 부각시키면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소련에 지고 있으니 따라잡아야 한다’는 ‘미사일 격차’ 논쟁은 1970년대 탄도탄미사일요격(ABM) 방어체제 격차 논쟁으로 이어졌다. 80년대 레이건 행정부가 등장할 시점에는 미국의 하늘이 소련의 공격에 열려 있다는 ‘허술한 창문’ 이데올로기로 다시 살아나, ‘별들의 전쟁’이라고 부르는 전략방위구상(SDI)으로 이어졌다. 2000년대 부시 행정부가 다시 들고 나온 미사일방어체제(MD) 역시 ‘스푸트니크의 밤’에 만들어진 과장된 공포 위에 서 있다.
훗날 케네디 행정부의 ‘미사일 격차론’은 과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1960년 당시 미국 공군은 30개의 미사일밖에 없었다. 소련은 100개 이상을 만들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실제로 1961년 소련이 보유한 ICBM은 겨우 4기였다.
북한이 70년대 중반 스커드 미사일의 기술 지원을 요청했을 때, 소련은 거절했다. 그러자 북한은 스커드 미사일을 이집트에서 수입해 ‘뜯어보고, 분해하고, 다시 조립해보면서’ 탄도미사일 개발을 시작했다. 1984년 스커드 개량형 A를 시험 발사했으며, 87년 가을에는 이란에 스커드 개량형 B 100여 기를 제공할 정도로 기술력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93년 5월 사거리 1300km의 노동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이른바 동북아에서 ‘북한 미사일 정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물론 북한과 미국의 대화가 시작되면서, 북한은 미국의 요청으로 미사일 발사를 포기한 적도 있다. 94년 5월과 96년 10월 발사대에 준비 중인 미사일이 미국의 인공위성에 포착됐고, 미국은 발사하면 관계 정상화 과정이 붕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를 위해 발사를 포기했다.
북-미 관계가 다시 삐거덕거리던 1998년 9월 북한은 운반 로켓인 ‘백두산 1호’가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지구궤도 위에 성공적으로 올려놓았다고 발표했다. 북한 당국이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 축구공만 한 ‘전파 발신 장치’에서 전해오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북한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무수단 하늘 위로 날아간 로켓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기술 능력을 보여줬다. 잠시 동안의 소란을 거쳐 협상이 시작됐다. 99년 ‘페리 프로세스’가 시작되고, 지지부진했던 북-미 미사일 협상은 다시 엔진을 가동했다.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에 갔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320마일(500km) 이상의 사정거리를 갖는 모든 미사일의 개발 실험을 동결하는 문제를 협의하자고 제안했다. 2000년 11월 중순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 있었던 북-미 미사일 협상에서 북한은 이러한 방침을 재확인했다. 나아가 이미 보유한 중장거리 미사일을 수년 내 폐기하겠다고 했다. 요구 조건은 무엇인가? 미국이 북한에 매년 3개의 인공위성 발사를 대신 해주고 또 매년 10억달러어치의 식량 등을 수년간 지원해달라는 것이었다.
북한의 로켓 개발은 군사적 억지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지만, 동시에 ‘경쟁력 있는 수출산업’이었다. 1993년 1월 이스라엘의 외무부 차관인 에이탄 벤처가 평양의 순안공항에 도착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이스라엘 고위 관리가 연관도 없는 북한을 왜 방문했을까? 그는 북한에 획기적 제안을 했다.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 광산과 농업 분야에서 기술적 지원 목적으로 수억달러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요구 사항은 무엇인가? 이란, 파키스탄 그리고 중동 국가에 대한 미사일 수출을 중단해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협상은 나중에 미국이 알게 되면서, 더 진전될 수 없었다.
2000년 11월 미사일 협상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구체적인 합의를 빌 클린턴 대통령과 직접 만나서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평양에 가지 않았다. 아니 못 갔다. 왜 그랬을까?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조지 부시 후보가 당선됐기 때문이다. 백악관의 새로운 주인이 될 사람은 이제 떠날 사람이 북한을 방문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그리고 미사일 문제는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말했다.
백악관의 새로운 주인은 올브라이트 장관이 “미국의 분명한 이익”이라고 했던 미사일 협상을 걷어차버렸다.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를 의욕적으로 준비 중이던 부시 행정부 처지에서 북한의 미사일 위협이 ‘50년대 과장된 소련의 미사일 위협’처럼 꼭 필요했다. 98년 7월 광명성 1호가 발사되기 한 달 반 전에 북한·이란·이라크 등 이른바 불량국가의 미사일 위협에 관한 ‘럼즈펠드 보고서‘가 발표됐다. “3~4년 안에 북한 미사일로 미국 전역이 생화학무기 공격 사정권에 들어갈 것”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북 로켓 향상됐지만 ICBM 수준에는 못 미쳐그러나 98년에 발사한 로켓의 2단계 추진체는 1550km 날아갔고, 2006년의 로켓은 42초 만에 폭발했으며, 2009년에는 3200km를 날아갔다. 2009년의 경우 엔진 성능이 개선되고 사거리가 비약적으로 늘어났지만, 여전히 전문가들은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유도탄(ICBM)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평가한다.
98년 럼즈펠드 보고서와 북한의 로켓 발사는 부시 행정부가 NMD 계획을 밀어붙이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북-미 미사일 협상에 관여했던 웬디 셔먼 전 대북정책조정관은 2001년 3월7일 에 보낸 기고문에서 “비용이 덜 드는 미사일 협상 대신, 왜 달러와 값비싼 외교적 비용을 치르며 미사일 방어망 시스템을 구축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2009년 4월 무수단의 로켓은 또다시 군산복합체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다. 이젠 일본판 군산복합체도 꿈틀거린다. 아이젠하워의 경고를 명심하고, 2000년 협상을 기억해야 한다. 무수단에서 불을 뿜는 로켓이 아니라, 용솟음치는 파도를 보고 싶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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