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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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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추억’이 무색한 냉전의 ‘현실’


금강산과 개성공단이 북한의 핵개발을 도왔다니… 이제야 알 것 같다, MB의 달빛을
등록 2009-07-16 17:40 수정 2020-05-03 04:25
‘어쩔 텐가, 이산가족.’ 2007년 10월17일 오후 북녘 땅 금강산 외금강호텔에서 벌어진 제16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북쪽 오빠 윤영섭(73)씨가 남쪽 동생 윤복섭(68)씨를 만나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어쩔 텐가, 이산가족.’ 2007년 10월17일 오후 북녘 땅 금강산 외금강호텔에서 벌어진 제16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북쪽 오빠 윤영섭(73)씨가 남쪽 동생 윤복섭(68)씨를 만나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얼마 전 택시를 탔다. 북한이 미사일을 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민주 인사’처럼 보이던 택시기사 아저씨, 갑자기 ‘보수 인사’로 돌변한다. ‘급당황’,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저것들은 굶는다면서 뭔 돈으로 미사일을 펑펑 쏘는지….” 그 다음에 이어질 말, 짐작이 간다. 역시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너무 북한에 퍼주었다”는 말, ‘퍼주기 이데올로기’다. 한국의 이른바 보수가 내놓은 것 중에서 아마도 가장 성공한 프레임이지 싶다.

성공한 프레임 ‘퍼주기 이데올로기’

그렇다고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설 줄이야. 깜짝 놀랐다. “지난 10년간 북한에 지원한 돈이 북한의 핵개발에 쓰여졌다.” 그렇게 ‘의혹’을 제기했다.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의 정수를 확인하는 발언이다. 이 말은 지난 1년6개월 동안 이명박 정부가 남북관계를 왜 이렇게 몰아왔는지,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 대북정책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를 예고하는 ‘결정적 한마디’다.

왜 6·15와 10·4,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을 부정했는지, 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지 1년이 되도록 방치하는지, 왜 개성공단이 폐쇄돼도 상관없다는 투인지, 왜 요즘에는 아예 기업인들의 방북까지 금지했는지, 그래서 경제를 살리겠다는 정부가 어렵게 모진 세월을 헤쳐온 중소기업인들의 목소리에 꿈쩍 않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모든 의문이 풀렸다.

‘아무리 뉴라이트라 하더라도 국정운영을 책임진 사람들인데, 그래도 한반도 정세 관리의 책임감은 느끼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보수 정부에서도 대화를 하고, 교류협력을 추진하지 않았던가.’ 그런 일말의 기대감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대한민국 역사에서 듣도 보도 못한 대북정책의 실체를 목격하고 있다.

‘퍼주기’, 그것은 보수 언론과 보수 정치인들이 합작해서 발명한 증오의 이데올로기다. 정치적 선동으로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정책으로 말하기에는 너무 수준이 낮고, 근거가 박약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난 10년 동안 정부 차원에서 북한에 준 현금은 없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즈음에 북한에 건너간 4억5천만달러는, 특검에서도 밝혀졌지만, 현대의 7대 대북 경협사업 독점권의 대가이다. 정부가 송금 편의를 제공해서 외환거래법 위반으로 기소됐지만, 정상회담의 대가는 아니라고 명백하게 밝혔다. 퍼주기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일단 대북송금 특검의 수사 결과 발표문부터 읽어보기를 권한다.

반세기 분단의 아픔을 딛고 북녘 땅 금강산 관광길에 나선 ‘현대 금강호’가 1998년 11월18일 오후 동해항 부두에서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출항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자료

반세기 분단의 아픔을 딛고 북녘 땅 금강산 관광길에 나선 ‘현대 금강호’가 1998년 11월18일 오후 동해항 부두에서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출항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자료

정부 차원에서 북에 준 현금은 없다

지난 정부에서 현물은 인도적 지원 목적으로, 철도를 연결하기 위해,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준 적이 있다. 그러나 현금 지원은 없었다. 도대체 북한으로 간 현금의 정체는 무엇인가? 금강산 관광대금, 개성관광 관광료, 개성공단 임금, 그리고 교역 대금이다. 정부 차원이 아니라, 민간의 정상적인 경제적 거래 대금이다. 이런 돈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그럼 경제협력을 하지 말라는 말 아닌가. 무역을 하면서 무역대금의 용도를 지정할 수는 없다. 우리 동네 구멍가게 주인 아저씨가 노름을 한다고, 음료수 사면서 돈 대신 현물을 줄 수 있는가.

그럼, 그 가게 안 가면 된다고? 남북 경제협력이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금강산 관광, 지금까지 195만 명이 다녀왔다. 가지 말라고? 그거야 일부 뉴라이트 인사들이나 그렇게 생각하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개성공단, 다른 대안이 있는가? 노동집약적인 중소기업들이 중국·베트남에서 모두 해봤지만 실패하고 마지막 출구로 생각하는 곳이다. 지구상에서 한 달에 60달러의 임금을 주고 기업을 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는가? 개성 말고 없다. 개성공단 임금을 퍼주었다고? 우리 중소기업들이 그동안 얻은 수십 배의 이익은 왜 안 보는가.

교역도 우리가 필요해서 하는 것이다. 북한산 모래 교역을 예로 들어보자. 2007년의 경우 북한산 모래 반입량은 1495만㎥로, 수도권 연간 수요량(3700만㎥)의 40%를 차지했다. 한 해 모래 대금으로 지급한 금액이 3500만달러(2007년)로, 금강산 관광대금(연간 2천만달러)이나 개성공단 임금보다 많았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가? 국내에서 하천모래나 근해의 바닷모래 채취에 대한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생긴 자연스런 현상이다. 물론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환경 규제가 슬그머니 완화되면서 국내 연안의 바닷모래 채취량이 늘어났다. 하지만 북한산 모래가 반입되지 않은 2009년 들어와서 모래 가격이 폭등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성은 중소기업의 마지막 출구
‘냉전의 반세기를 뚫고.’ 2000년 6월15일 오후 평양 순안공항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전용기 트랩에 오르기 직전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작별의 포옹을 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냉전의 반세기를 뚫고.’ 2000년 6월15일 오후 평양 순안공항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전용기 트랩에 오르기 직전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작별의 포옹을 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퍼주기, 정치적 구호다. 대중의 정서를 한순간 왜곡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토론의 주제는 되기 어렵다. 퍼주기라는 용어는 모든 교류협력을 일방적 시혜로 규정한다. 그래서 안 퍼주겠다는 정책이 나왔다. 그러나 거래는 주고받는 것이다. 특히 민간의 경제협력은 경제성이 있어야 가능하다. 노태우 정부의 ‘7·7 선언’ 이후 남북 경제협력이 시작됐다. 이익을 보는 기업들은 계속 사업을 하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사업을 중단했다. 15년 이상 꾸준하게 위탁가공 사업을 하는 기업들도 있다. 그런 기업들 보고 이명박 대통령이 말했다. 당신이 북한의 핵개발을 도왔다고. 금강산에 다녀온 195만 명에게도 말했다. 당신이 준 돈으로 북한이 핵개발을 했다고. 개성공단의 중소기업 사장에게도 말했다. 당신이 준 임금으로 북한이 핵개발을 했다고. 이래도 되는가.

그래, 이것이 ‘달빛정책’이구나…. 김대중 정부 때 햇볕정책을 비판하는 한나라당을 보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말했다. “그렇게 햇볕정책이 싫으면 달빛정책이라도 내놔봐요.” 그래서 나왔구나. 해가 지고 달이 떴다. 바람이 스산하게 불고, 늑대가 울부짖는다. 다시 살아나는 냉전의 추억이여.

‘냉전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했다. 분단의 세월은 흘러가는데, 분단의 현실을 잊어가는 젊은 청춘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남과 북이 만나고 싸우고 화해하고 협력하는 분단의 풍경을. 우습고도 슬픈 추억들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어디서 본 듯한 풍경이 현실로 다가왔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칼럼이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의 정치가 돼버렸다.

비방과 중상이 다시 등장하고, 북한 붕괴론과 흡수통일론이 공개적으로 거론됐다. 김영삼 정부 때 지겹도록 보던 풍경들이다. 여기서 잠깐, 김영삼 정부 때 사람들은 자신들을 이명박 정부와 비교하면 기분 나빠할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좌충우돌이 결국 남북관계에서 ‘잃어버린 5년’을 만들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온건파와 강경파의 노선 갈등이라도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사, “어떠한 동맹도 민족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발언을 기억하는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초기에 대북정책을 맡기도 했다. 물론 얼마 못 가 강경파들에 밀렸지만 말이다. 그리고 김영삼 정부는 여론을 중시했다. 다만 너무 빨리 여론에 반응하다 보니 냉탕과 온탕을 너무 자주 들락거렸지만 말이다.

이명박 정부는 일사불란하다. 강경파들은 넘쳐나고, 나머지는 영혼을 비우고 산다. 겨우 2년 전에 보수 야당의 ‘퍼주기’ 선동을 조목조목 비판하던 통일부이건만, 그때 작성했던 문건들이 아직도 인터넷 공간에 남아 있건만, 입을 닫고 있다. 비둘기파는 없다. ‘김영삼보다 못한…’, 이렇게 말하면 너무 심한 욕이 될까.

YS 땐 노선 갈등이라도 있었는데…

북한 정보를 둘러싼 과잉 대응도 마찬가지다. “김정일 위원장이 양치질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됐다”고 말하는 청와대 관계자를 보면, 아마도 ‘마법의 거울’이라도 갖고 있는 듯하다. 후계자 문제와 관련된 각종 ‘소설’들도 마찬가지다. 대화가 끊기면, 상대의 소식이 궁금해진다. 무책임한 호기심이라고 할까? 대북‘정책’보다 대북‘정보’가 넘쳐난다는 것은 확실히 대화가 중단됐을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상대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고, 추측과 첩보를 공개적으로 떠들어도 부담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지난 2004년 10월20일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회 개소식과 시범단지 입주기업 공장 착공식에 참석한 남북한 인사들이 ‘상생공영’의 첫 삽을 뜨고 있다.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지난 2004년 10월20일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회 개소식과 시범단지 입주기업 공장 착공식에 참석한 남북한 인사들이 ‘상생공영’의 첫 삽을 뜨고 있다.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냉전의 추억은 또한 지독한 슬픔의 풍경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이산가족 상봉이 끊겼다. 오늘도 대한적십자사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한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소원’을 풀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난다. 2008년만도 무려 2184명이 이산의 아픔을 안고 숨을 거뒀다. 2009년 1월 말 현재 12만7356명의 신청자 중에서 이미 고인이 된 분들이 3만8926명이다. 가혹하고, 야속한 현실이다. 금강산 관광이라도 할 수 있다면, 먼발치에서나마 그리움을 달랠 수 있을 텐데, 그조차 막혀 있다.

북한과 왜 대화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 바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서다. 1971년 분단 이후 첫 번째 남과 북의 만남, 바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이었다. 1985년 처음으로 이산가족 고향 방문이 이뤄졌다. 그리고 또 한참의 세월이 흘러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하고 나서야 정례적인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질 수 있었다. 지난 10년의 대북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이산가족 상봉 규모를 제시하겠다. 2000년 이래 2007년까지 남북 이산가족 상봉 사업은 대면 상봉 16회, 화상 상봉 7회 등 무려 1만9960명의 상봉이 이뤄졌다. 이명박 정부는 과연 임기 중에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킬 수 있을까?

상봉 못하고 눈 감는 이산가족들

개성에 현대아산 직원 유아무개씨가 억류된 지도 100일이 지났다. 북한을 규탄하는 궐기대회,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정부라면, 유씨를 데려오는 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난 10년 동안 남북 접촉의 현장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건과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해결했다. 남북 대화가 이뤄지면 문제를 풀 수 있다. 이명박 정부는 지금까지 유씨를 석방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데모하듯이 확성기 들고 시위하는 것 말고, 도대체 무슨 노력을 했는지 묻고 싶다.

북한 인권 문제, 마찬가지다. 북한의 인권이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국군 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보자. 그래도 지난 10년 동안 미흡하지만, 남북한의 합의 문서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나가자는 합의를 담았고, 일부는 ‘특수이산가족’의 범주에 넣어 생사 확인과 상봉이라도 했다. 이명박 정부는 그동안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이래서야 임기가 끝날 때까지 북한의 인권 문제 개선 실적이 지난 정부보다 나을 수 있겠는가?

‘분단의 장벽을 넘어.’ 2007년 10월2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 부부가 사상 처음으로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분단의 장벽을 넘어.’ 2007년 10월2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 부부가 사상 처음으로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가장 억울한 사람들은 아마도 중소기업인들이다. 개성공단의 중소기업들은 오늘도 불안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남북한의 정치·군사적 대결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얼마나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가? 1990년대 초 국내에서 경쟁력을 잃은 신발·섬유·봉제·기계제작 업체들은 중국으로, 동남아로 떠났다. 낮은 인건비를 찾아서 말이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고, 이들 국가에서 산업구조가 고도화하면서 경쟁력을 잃었다. 노동집약 산업이야 어디 기술 경쟁력이 있는가. 인건비는 높아만 갔고, 현지 기업의 추격도 만만찮고, 결국 실패하고 돌아왔다. 누군들 대북사업이 위험하다는 걸 모르겠는가. 남북관계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걸 모르겠는가.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는데, 어디로 가란 말인가.

7만5천 명의 일자리는 어떡하라고

지금과 같은 불안한 정세에서 개성에서 버틸 수 있겠는가? 필자가 만난 어떤 중소기업인은 이렇게 말했다. “정부가 보상을 해줄지 모르겠지만, 보상을 해준다고 하더라도 그거 받아서 음식점을 할 수도 없고….” 개성에서 철수하면 갈 데가 없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현재 개성에 진출해 있는 기업은 106개에 불과하지만, 그 협력업체와 연관업체는 국내에 2600여 개나 된다는 사실을. 원자재와 부품을 모두 남쪽에서 갖고 가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연관 산업이 포괄적이다. 관련 기업들의 주장에 따르면, 남쪽에 산재해 있는 협력업체를 모두 포함하면 7만5천 개 일자리라고 한다. 결코 적지 않은 규모다. 더 중요한 것은 개성을 바라보는 중소기업들의 희망이다.

현대아산 사람들을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 어떻게 살아온 세월인가. 금강산이 겪은 지난 11년의 세월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온갖 풍파를 헤치고 여기까지 왔다. 금강산을 다녀간 이산가족들의 그리움을 함께 느꼈고, 학생들과 함께 통일의 꿈을 같이 꾸었다. 벌써 1년인가? 금강산에 흐르는 적막이여. 현대아산 식구들의 눈물이여.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정부에 제언을 했다. 그 길은 가지 말아야 한다고. 이제는 차라리 ‘그냥 가봐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달빛정책’도 교훈을 줄 수 있겠지. 반면교사라고나 할까? 다만 철로는 녹슬고, 금강산 가는 길엔 잡초가 자라고, 이산가족들의 마음은 멍들고, 중소기업들은 절망하겠지. 안타깝구나 냉전의 현실이여. 다시 살아나는 냉전의 추억이여.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김연철의 냉전의 추억’은 769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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