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경상남도 남해군 미조면 바닷가 바위 기슭. 강아지풀 사이로 강아지가 머리를 내민다. 눈앞에서 죽을까봐 겁난 건, 너를 위한 걱정이었을까 나를 위한 걱정이었을까. 아무튼 새 식구가 되었어.
하마터면 칠 뻔했다.
시커먼 덩어리가 4차선 도로를 쪼르르 넘더니 겁도 없이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속도를 늦추자 달아나기는커녕 쫓아왔다.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차를 세우니 꽁지를 흔들며 품에 안기는 게 아닌가.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검은 강아지였다. 하, 요런 맹랑한 녀석.
그대로 뒀다간 곧바로 죽을 목숨처럼 보였다. 내가 죽일 뻔한 강아지는, 얼마든 남이 죽일 수도 있는 강아지일 테니. 섬에서 육지로 이어지는 4차선 도로는 교통량이 많지 않아 한적했지만, 속도가 빨라 ‘로드킬’이 빈번했다. 갈 길이 멀고 급했으나, 하는 수 없었다. 강아지를 태우고 차를 돌려 맞은편 마을로 넘어갔다. 짐작건대 녀석이 건너왔던 곳에 집이 있으리라. 하지만 어느 집인지 알 리 없었고, 마을 입구에 녀석을 내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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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도로로 접어드는데, 어느새 따라왔다. 급기야 차를 앞지르더니 또 도로로 뛰어드는 게 아닌가. 이러다간 눈앞에서 죽을 판이었다. 녀석을 잡아 다시 차에 태웠다. 물어물어 개주인을 찾을 시간이 없었다. 경상남도 남해도에서 출발한 나는 전라남도 자은도에서 누군가를 만나야 했다. 오전 10시에.
어린 녀석이 언제 차를 타봤겠는가. 차에 오른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녀석은 멀미를 시작했고, 무방비 상태의 차 바닥은 시큼하고 걸쭉한 액체로 흥건해졌다. 귀여웠던 강아지가 삽시간에 산전수전 다 겪은 견생막장 꼬락서니로 침을 질질 흘려댔다. 편의점에서 종이상자와 신문지를 구해 바닥에 깔았다. 게울 것을 다 게운 녀석은 지쳐 쓰러져 잠들었다.
진을 다 빼고 한숨 푹 잔 덕일까. 목적지에 내린 녀석은 물을 한 사발 먹더니 생기를 찾았다.
한창 일하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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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경찰서 ○○○ 순경입니다. ○○○번 차주 노순택씨 맞나요.” 경찰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언제 받아도 찌릿하다.
“오늘 새벽 6시50분경 고현면 오곡리 차도에서 검은 강아지를 습득하지 않으셨나요.” 닦달하지 않는 경찰에게 흘러나오지도 않은 진땀을 닦으며 해명했다. 개주인의 연락처를 받은 뒤 끝으로 물었다. 어떻게 나를 찾으셨나요?
“시시티브이(CCTV)를 확인했습니다. 거기에 다 찍혀 있더군요.”
개주인을 찾았다는 안도감이 물러가자,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다 아신다는 ‘높은 곳에 매달린 님’의 전능함에 서늘함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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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강아지를 데리고 찾아갔을 때, 개주인은 다시 해명하는 내게 “다 알고, 다 보았다”며 고마워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큰 인연인데, 데려가 키울 생각 있으신가요. 보다시피 저희 집 어미가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았답니다.”
하룻밤에 정이 들었을까. 우리 집 마당에서 녀석이 뛰어놀고 있다. 새로 지은 이름 자은이.
사진·글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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