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고구려인도 중국인도 왜인도 아닌 동아시아 사상가들</font>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고금동서 인류의 어쩔 수 없는 한계겠지만 우리는 대개 먼 과거의 사람들이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삶의 패턴을 가졌다는 것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우리에게야 국적은 혈액형이나 체형 같은 태생적인 것으로 사료된다. 우리는 온 세상의 사람들을 국적별로 분류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국가 귀속 의식이 강했다 해도
미 제국의 대외 정책 비판에 평생을 바쳤다 싶은 아나키스트 노엄 촘스키도 어디까지나 미국 지식인, 미국의 양심으로 이해되고, 러시아 일국 혁명이 아닌 세계 혁명을 갈망하다 결국 러시아에서 일국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된 트로츠키(1879~1940)도 늘 러시아 혁명가로 소개된다. 영어로 쓰는 일기에서 “이 세계의 낙원인 일본에서 평생 살았으면 좋겠다”는 유의 발언을 많이 남긴 제국주의 시대의 어설픈 ‘국제적 문명인’ 윤치호(1865~1945)가 우리에게 당연히 ‘조선 개화주의자’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시각으로 국민국가 질서 ‘바깥’에서 놀았던 사람들이나 국민국가 질서가 성립되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을 보다 보면 엄청난 몰이해를 낳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국적별 분류는 그들에게도 관습적으로 적용된다.
혁명적 활동으로 프로이센 국적을 잃어 평생의 대부분(1849년 이후)을 런던에서 무국적자로 보낸 카를 마르크스(1818~83)가 독일인으로 기억되는가 하면, 십대 중반 이후 주로 코펜하겐에서 활동하며 덴마크 근대문학의 원조로 평가받을 정도로 덴마크 문학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루드비그 홀베르(1684~1754)가 당시 덴마크의 속지이던 노르웨이 태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노르웨이에서 노르웨이 작가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국민국가의 틀이 꽉 잡혔던 19세기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로 올라갈수록 이러한 분류가 가시적으로 어려워진다. 베니스가 영유했던 (오늘날 그리스의) 크레타섬 태생으로 이탈리아에서 교육받고 주로 스페인에서 화가로 일했던 엘 그레코(1541~1614) 정도면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질문은 무의미해지고 만다.
물론 유럽에 비하면 전근대적 관료제 국가의 틀이 훨씬 더 일찍 뚜렷해진 동아시아에서는 특정 국가에 대한 귀속 의식이 고대부터 비교적 강했다. 8세기 후반, 로마 교황들이 카롤루스 대제(재위 768~814)와 같은 ‘야만족 국가’의 군주에게 대관식을 거행하는 등 군주 이상의 권력을 과시했을 때, 신라에서 경덕왕(재위 742~765)이 신라의 마지막 성인으로 칭송됐던 표훈(表訓) 대덕이라는 고승에게 “천제(天帝)의 궁으로 가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이야기해달라”는 식으로 나중에 전설화된 기자(祈子) 기도 ‘주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다. 로마 교황과 그가 거느리는 각국 기독교 성직자들은 당시에 국가권력 ‘바깥’에, 또는 그 ‘위’에 있었지만, 왕실에 전적으로 달려 있던 불국사의 주지 표훈은 승려임과 동시에 신라의 충신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서 제자를 거느린 승랑
그러나 ‘강성국가’로 유명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승려들이 국가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향유할 수 있는 시대가 없지 않아 있었다. 예컨대 한나라가 완전히 망한 220년부터 천하가 다시 수나라에 의해 통일된 581년까지 350년의 혼란기 동안 특히 북쪽 국가들이 승려들을 예속화하려고 노력했다 해도 전반적으로 승려들의 국적을 논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혼란 속에서 국경이 하도 자주 바뀌고 또 유학이나 구법 등을 이유로 하는 승려들의 국제적 왕래가 하도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7세기 초반에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상인 삼론종(三論宗)을 성립시킨 길장(吉藏·549~623)의 경우를 보자. 그의 조상들은 오늘날 이란과 중앙아시아에서 존재했던 파르피아(안식국) 사람들이었고, 그 자신이 양나라 시대에 남중국에서 태어나 진나라 시대에 공부를 했지만 나중에 수나라 황제들의 보호를 받으며 수나라의 주요 국가적 사찰에서 생활했다. 끝에 가서 수나라가 망하는 꼴까지 본 그의 국적을 과연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가? 더욱더 재미있는 것은, 길장을 후하게 후원한 수나라의 국력을 쇠진케 한 고구려에서 태어난 한 승려는 바로 길장이 가장 존중하던 그의 사상적 원조였다. 길장처럼 국적을 간단히 정리할 수 없는 그 고구려 계통의 승려는 바로 동아시아 사상사에 길이 남을 승랑(僧郞·5세기 후반~6세기 초반) 대사였다.
승랑이 혈통적으로 고구려인이었는지, 말갈 계통이었는지 혹은 한인(漢人)이었는지 아무도 정확히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쪽에는 그에 대한 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며, 중국 쪽에선 그를 요동 지역, 종족 구성이 복잡했던 고구려 출신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곳은 고구려 영토였다 해도 그가 공부한 곳은 중국 북쪽의 제나라였고, 또 말년에 그를 후하게 대접한 군주는 양나라의 유명한 무제(武帝·재위 502~550)였다. 양나라의 최고 승려들을 제자로 삼았던, 그리고 끝내 고구려로 돌아가지 않았던 이 고구려 출신 승랑의 국적을 과연 어떻게 봐야 하는가?
승랑의 일생만큼이나 그의 사상도 ‘무국가적’ 성격이 강하다. 그가 초석을 놓은 삼론학의 근원은 인도의 나가르주나(龍樹·150~250경)와 아리아데바(提婆·3세기)가 쓰고, 구차(龜玆)라는 작은 서역(오늘날 중국 신강 지역) 나라 출신으로 생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보낸 구마라즙(鳩摩羅什·344~413)이 한문으로 번역한 3개의 논서인데, 그 중심 이념은 공(空)과 연기(緣起)다. 범부들이 세계의 각종 현상들이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실제로 이는 인연에 따라 떴다 없어졌다 하는 일종의 가상(假像)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궁극적인 진리(진체·眞諦)에만 집착하고,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각종 현상들, 즉 상대적인 진리(속체·俗諦)를 모조리 무시해버리면 그것도 지나친 극단주의, 정진을 방해하는 벽(癖)이 되지 않는가?
일본으로 떠난 고구려 승려들
승랑과 길장 등이 이 문제에 천착해 안일함으로 귀착될 수 있는 상대적 존재에 대한 집착과 일반인과의 소통을 끊는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집착을 동시에 없애는 논리적인 방법, 즉 ‘네 단계의 양쪽 진리 전개’(사중이체·四重二諦)를 발명했다. 즉, 먼저 존재의 상대성과 ‘공’의 절대성을 세우고, 그다음에 두 가지의 진리를 설정시키는 발상은 이미 진리를 떠난 사변적 형태임을 밝히면서 좀더 궁극적인 진리가 불이(不二)하다는 것을 세우고, 또 그 뒤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불이의 발상도 ‘두 개의 진리’ 발상도 다 상대적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고 죽는 것을 진짜라고 믿는 일반인의 마음도 불이를 논하는 수행자의 마음도 아직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미 깨달은 입장에서는 사변적인 논리 그 자체가 상대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는데, 생각과 언어의 상대성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은 바로 고구려 출신 승랑을 그 기원으로 하고 중앙아시아 출신 길장을 그 집대성의 주인공으로 하는 삼론사상이다.
인도의 논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중국에서 한문을 매개로 하여 형성된 뒤 한반도와 왜국으로 퍼진 이 사상은 과연 뚜렷한 ‘국적’이 있는가? 결국 하나의 지역적 문화 형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지역적 문화의 일본열도 전파에 ‘국적이 없는’ 고구려 승려들이 다시 한 번 크게 기여한 바 있다는 점이다. 중국에 건너가 길장에게 삼론학을 배운 뒤 다시 625년 일본에 가서 삼론을 하나의 종파로 성립시킨 고구려 출신 혜관(慧灌) 같으면, 과연 “어느 나라 사람이었느냐”고 물을 수 있겠는가? 그도 말 그대로 ‘동아시아인’이었고, 주로 당나라에 가서 유학했거나 일부 고구려 유학을 했다가 중국 유학까지 겸한 그의 제자들도 그랬다. 7세기는 중국도 통일되고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도 신라의 차지가 되고 일본열도에서도 중앙집권화가 도약적으로 진전됐지만, 적어도 승려에게는 획일화된 ‘국적’의 논리가 아직 전반적으로 적용되지 않았던, 참으로 행복한 시대였다.
‘국제인’ ‘동아시아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 삼국시대 한반도 불교의 전체적인 상황이었지만 백제나 신라에 비해 고구려에서 출신 국가를 아예 떠나버리고 돌아오지 않는 명승이 유난히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과 지리적으로 접해 있고 중국 사상의 최신 경향들이 시차 없이 곧 소개되고, 또 계통적으로 한인 등 다양한 종족이 어우러져 살았던 다민족 복합국가 고구려의 기본적 특징이 작용했으리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원효를 신라 사상가로만 봐야 하나
고구려 승려들이 중국 최신 학파를 소개받아 그 학파의 거장들에게 나아가서 직접 배우고, 나중에 해당 문중 안에서 중진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일 없이 중국에서 계속 살다가 입적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고구려 출신의 파약(波若·562~613)은 진나라 시절에 중국 강남에 가서 법화경을 기반으로 천태학(天台學)이라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짜고 있던 지의(智?·538~597) 대사를 사사했다. 598년, 고구려의 선제 공격으로 결국 수나라를 망하게 할 고구려와의 전쟁이 시작됐을 때, 파약은 ‘고구려 원정 필승 기도’를 올리고 있던 천태종 동학들을 떠나 스승 지의가 옛날에 참선 수행했던 천태산의 화정봉에 올라가 거기에서 16년 동안이나 피나는 노력으로 용맹정진을 했다. 그가 입적한 것은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이 한창이던 613년인데, 그가 ‘적국 출신’임에도 천태산 근방 주민들에게 대단한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존경을 받지 않았다면 그가 이미 주검이 되어 영원히 묻힐 장소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눈을 여는 기적을 일으켜 생전에 마음의 개안(開眼), 즉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전설이 후대에까지 남았겠는가? 그가 중앙에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은둔 생활을 택한 배경에 고구려와의 전쟁이라는 상황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를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영승(靈僧)’으로 대접했던 일반인들은 그의 출생지가 어디인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는 고구려에서 혜자(惠慈·? ~622)처럼 왕명으로 왜국으로 파견되어 불교 전파에 힘쓰는 한편 수나라를 겨냥했던 고구려와 왜국의 준동맹 건설에 이바지했던 ‘외교관형 승려’도 있었지만, 안장왕(재위 519~531) 시해, 안원왕(재위 531~545) 말년 귀족들 사이의 내전 등 내부적 정치 갈등으로 고구려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 551년에 고구려의 적국인 신라로 망명한 혜량(惠亮)이나 왕실의 도교 진흥책에 분노해 650년에 동맹국 백제로 이주한 보덕(普德)처럼 당대 권력자들과의 불협화음으로 영원히 떠나는 ‘탈고구려파 승려’도 있었다. 우리에게야 거의 ‘국가에 대한 배신’으로 보일 수 있는 행위지만, 과연 보덕 스님에게 수업했던 원효(617~686)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대한민국의 교과서나 개설서야 원효를 ‘신라 승려’이자 ‘한국 불교의 자랑’으로 호명하지만, 원효의 저서에서 신라라는 고유명사는 기껏해야 몇 차례밖에 보이지 않는다. 백제로 이주한 보덕에게 불교 교리를 배우고, 고구려 출신 승랑의 학설을 계승한 길장의 삼론학을 하나의 바탕으로 삼고, 사후에 고국 신라보다 오히려 일본에서 더 유명해졌던 원효를 신라 사상가라기보다는 동아시아 사상가로 자리매김하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사상의 흐름, 국경을 넘어 이해하자
고구려 승려들 중에서 5세기의 도림(道琳)처럼 백제와의 첩보전에서 간첩으로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거나 혜자처럼 고급 ‘종교 외교관’으로 국가에 복무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 고구려라는 특정 국가와 무관한 사상적 활동이나 수행에 전념해 동아시아 지역 전체의 사상적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이들도 있었다. 승랑이나 혜관은 고구려인도, 중국인도, 왜인도 아니고 동아시아 불교의 사상가들이다. 국경을 넘어 활약했던 그들처럼 우리도 국경에 대한 집착을 초월해 한반도를 둘러싼 사상의 흐름을 ‘지역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font color="#C12D84">참고 문헌</font>
1. 가마타 시게오(신현숙 옮김), 민족사, 1988, 34~39쪽
2. 불교사학회 엮음, 민족사, 1989, 42~49, 183~229쪽
3. 도오도오 교순·시오이리 료오도(차차석 옮김), 대원정사, 1992, 242~251쪽
4. 정선여, 서경문화사, 2007, 56~64, 109~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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