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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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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가수와 캄보디아 소녀가 겹쳐 보였다

등록 2024-10-11 18:09 수정 2024-10-18 10:57


7개월 전쯤 한국에서 성착취 피해를 입은 마리(가명)라는 필리핀 여성을 인터뷰(제1503호 참조)한 적이 있다.

필리핀 시골 마을에서 무척 가난하게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좋아하고 곧잘 했다. 도시에서 열린 노래 경연대회에서 수상할 정도였다. 그가 20대가 됐을 때 지인은 ‘한국에 가면 노래로 돈을 벌 수 있다’고 말했다. 일할 곳이 마땅치 않은 필리핀과 달리 한국 리조트나 식당 등에서 노래하면 온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권유였다. 그렇게 브로커를 통해 한국에 입국하게 된 그가 이송된 곳은 경기도의 한 클럽. 이후 그가 겪게 된 일들은 ‘인신매매’란 말 외에는 달리 표현이 안 되는 것들이었다. 여권 압수, 임금체불, 성접대 강요, 외출 감시…. 불법 성매매업소 단속을 나온 한국의 한 경찰이 그를 발견해 ‘도망치라’고 말하기 전까지 그의 삶은 앞이 보이지 않았다. 마리와 비슷한 피해를 본 필리핀 여성들은 한국 공익변호사의 도움으로 유엔에 진정을 냈고, 2023년 11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대한민국이 강제 성매매를 당한 필리핀 여성을 인신매매 피해자로 확인하고 보호하는 데 실패하고, 사법 및 충분한 구제방안 접근을 보장하지 않아 이들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마리는 지금 경기도 어딘가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 신분으로 공장 일을 하고 있다. 브로커를 만나면서 생긴 채무, 한국에서 노래로 돈을 벌 것이란 기대를 품고 있는 가족, 무엇보다 교육을 받으려면 돈이 필요한 어린 딸이 그가 필리핀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다.

지난 기사 이야기를 다시 하는 이유는, 한겨레21 제1533호 표지이야기로 다룬 ‘캄보디아 빈곤층 금융착취’ 취재 때 만난 한 시골 소녀가 마리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소녀의 가정은 한국의 케이비(KB)국민은행이 캄보디아 현지 마이크로파이낸스(소액금융) 기관을 인수해 만든 ‘KB프라삭 은행’에 진 채무 때문에 몰락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어머니는 빨래나 거리 국수 장사로 돈을 버는데 그 돈으론 높은 연 이자율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소녀의 엄마가 “죽은 남편을 똑 닮아 딸이 노래를 무척 잘한다. 가족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결혼식장 노래 등을 통해 돈을 벌어 채무 상환을 돕고 있다”고 말했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그가 마리와 같은 경로를 걷게 될까 두려웠다. 소녀는 자기 친구 중에서도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한국 등으로 이주노동을 고민하는 친구가 있다고 말했다.

‘캄보디아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의 비윤리적 대출 관행’ 패턴은 간단히 줄이면 다음과 같다. KB프라삭 등 한국 기업을 포함한 현지 금융기관 직원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가난하고 금융 문해력이 없는 캄보디아 농민들에게 대출을 권유한다. 이때 이자율은 연 20% 수준인데 가난한 농민들은 결국 이 빚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때 대출을 권유했던 직원 중 일부는, 다시 사채를 이용해 은행 빚 상환을 권유한다. 이 길을 선택하는 순간 이들은 연 이자율 120% 수준의 채무 수렁에 빠진다. 결국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토지나 농기구를 빼앗기고 경제적 파멸에 이른다. 이것이 캄보디아 금융시장의 전체 풍경은 아닐지라도, 캄보디아 시골 어딘가에선 분명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독자 반응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댓글은 ‘느리게라도 해결되기를’이었다. 느리게라도 변화하려면 독자의 관심이 절실하다. 캄보디아 현지조사에 나섰던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서울대 공익법률센터의 공익변호사들은 오늘도 해결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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