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가을 어느 날, ‘보스’라는 투박한 애칭을 가진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반핵 콘서트에서 노래한다. 데뷔한 지 15년여가 흘렀고, 그동안 일하는 사람들의 구체적 일상을 노래로 옮겨왔지만, 정치적 공연은 멀리해온 그였다. 노래는 단 2곡. 그중 하나는 이제 막 만들어 소개하는 신곡이었다. 제목은 . 그가 늘 애틋하게 여겨온 여동생도 초대했다. 이 또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모니카가 앞서고 그의 거친 목소리가 뒤따랐다. 읊조리듯 노래한다. 나는 골짜기에서 왔지. 아빠가 살아온 대로 살아가야 하는 곳에서.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에서 17살의 사랑스러운 매리를 만나 도망쳤지. 푸른 평야가 있는 곳으로. 그곳엔 강이 있었어. 우린 강물을 따라 자유롭게 떠돌았지. 곧 매리는 아이를 가졌지. 내 나이 19살. 서둘러 혼인신고를 했네. 웃음도, 꽃도, 그리고 웨딩드레스도 없는 결혼식. 그날 밤, 우린 다시 강으로 갔지. 돈을 벌어야 해서 노가다 일을 했는데, 경기가 좋지 않아 벌이가 시원찮았어. 그러니까 알겠더군.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냥 공중으로 사라진 거야.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척했고, 매리는 별일 아닌 척했어. 하지만 난 기억해. 동생 차를 타고 저수지로 가서 노닐던 밤. 몸이 젖은 채로 우린 방죽에 누워 있었어. 난 매리를 내 옆으로 이끌었어.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말이야.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목소리가 이렇게 고조되어 있을 즈음, 여동생은 직감했다. 오빠가 노래하고 있는 매리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그제야 그녀는 브루스가 노래하기 전에 얼버무리듯이 한 말의 뜻을 알게 되었다. 감정이 고조되어 더욱 거칠어진 노래는 계속된다. 아, 이젠 이런 기억들이 나를 저주처럼 괴롭혀. 이루지 못한 꿈은 거짓일까, 아니면 거짓보다 더 비참한 것일까. 그래서 난 다시 오늘 밤 그 강으로 가려 해. 이미 말라버린 강이지만.
그리스에는 지하로 흐르는 강이 있다. 옛적부터 신화처럼 믿어온 강인데 5개의 작은 강이 촘촘하게 이어져 있다. 그중 하나가 흔히 알려진 망각의 강, 레테 강이다. 상상의 강이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그리스에 흘러온 현실의 강이기도 하다. 그 강의 끝은 저승을 향해 있다.
2010년 봄, 그리스에는 난데없는 소식으로 아케론, 비통의 강이 열린다. 세계 전체가 경제위기의 격랑에 시달리는 판에, 그리스도 버틸 재간은 없었다. 다른 나라들처럼 경제가 어려웠다. 지난해부터 나라 빚이 많다는 얘기가 나돌았지만 그리 걱정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했다. 무엇보다 정부가 공식 통계를 내보이면서 자신만만해했다. 그러나 봄부터는 그 통계가 믿을 만한 게 아니고 실은 유럽연합(EU)에 가입할 때부터 애당초 부채 통계를 의도적으로 축소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세계적 명성을 누리던 골드만삭스가 ‘부채 축소 작전’을 진두지휘했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들리기 시작했다. 소문은 소문을 불러왔고 순식간에 국제 금융시장이 싸늘해졌다. 신용평가기관이 그리스 국채를 휴지 조각이라 선언하는 순간, 정부는 빈사 상태에 빠졌다. 일터에도 곧바로 어두운 구름이 깔리고, 지중해에서 갓 건져올린 물고기처럼 활달하던 아테네 거리도 고요해졌다. 비통을 넘겨줄 시간이 찾아왔다.
곧이어 코퀴투스, 탄식의 강으로 이어졌다. 과거를 돌이켜보며 탄식하는 시간이 왔다. ‘삼총사’가 아테네에 찾아왔다.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 그리고 유럽위원회가 돈다발을 들고 도움을 자청했다. 돈가방을 풀기 전에, 그들은 그리스 시민들에게 ‘흥청망청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회개하라 했다. 시민들은 흥청망청했던 정치인과 관료들, 그리고 부유층은 또렷이 기억해냈지만 그들의 과거는 그저 땀내 나는 일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삼총사의 훈계는 따가웠고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돈가방이 있었다. 그들이 내미는 서약서에 순순히 도장을 찍었다. 내용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허리띠를 졸라매서 정부 지출도 줄이고 임금도 깎고 사회보장도 대폭 축소하면, 당장은 조금 어렵겠지만 넉넉잡고 2년 뒤에는 경제가 회복될 것이라 했다. 더 이상 탄식의 강으로 떠내려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삼총사를 믿고 따르기로 했다. 영화에서 본 삼총사처럼 통쾌하길 바랐다.
하지만 곧 불길이 보였다. 모든 영혼이 불태워진다는 플레게톤, 불의 강이 나타났다. 허리띠를 잠시 졸라매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는 나락에 빠지고, 실업률은 28%, 게다가 청년실업률은 60%에 육박했다.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넘쳐났지만 그들은 늘 킬킬대던 예전의 그 사람들이 아니었다. 살림살이가 어려운 이들에게 주어지던 지원금은 줄어들거나 없어지고, 공공부문에서 대규모 해고가 일어났다. 삼총사의 진두지휘하에 진행된 ‘구조개혁’은 거침없었다. 희망의 해, 2012년이 왔지만 경제는 여전히 악화 일로였다. 오직 정부 부채만이 눈에 띄게 줄었다. 시민들은 불안해졌다. 사방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는데 빠져나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플레게톤 강에는 물살이 세지고 배는 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삼총사는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 했다. 내년에는 괜찮다 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고통은 ‘흥청망청했던’ 과거의 잘못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플레게톤 강바닥에는 코퀴투스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부채비율이 많이 줄었다. 부채비율이라 함은 정부 부채 규모를 국민총생산으로 나눈 것이라 했다. 그런데 조금 기이했다. 부채비율이 줄어든 것은 정부 씀씀이를 빈사 상태 수준으로 줄이면서 세금은 열심히 걷어들인 덕분이기도 했지만, 끝없는 불황 덕분에 국민총생산마저 줄었다. 이럴 거면 부채비율을 신줏단지처럼 모실 이유가 뭐냐면서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사실 문제는 좀더 심각했다. 정부 지출을 그렇게 줄였지만, 경제가 계속 불황이다보니 세수도 줄었다. 그런데도 부채비율은 계속 줄여나가야 하니 그나마 대폭 줄어든 정부 지출을 더 줄여야 했다. 방송사도 문을 닫고 동사무소도 문을 닫아야 할 판이었다. 악순환의 사슬에 빠진 듯했다. 그러다보니 첫해에 바짝 줄어든 뒤 부채비율은 고공비행을 계속했다.
삼총사는 그런 얘기도 했다. 최저임금도 삭감하고 공공부문 임금도 줄이면 민간부문 임금도 같이 삭감되어 수출경쟁력이 강화된다. 경제학자들이 즐겨 쓰는 용어로 ‘단위당 노동비용’이 줄기 때문이라 했다. 쉽게 말하면 수출 단가가 줄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그랬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수출은 생각만큼 늘지 않았다. 늘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감내해야 했던 비용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사달이 났다. 실업률은 하늘을 찌르고 임금은 줄어드니 시민들의 살림은 고달파졌다. 지갑에 열쇠라도 채워야 할 판이었다. 거리에 사람은 웅성대지만, 가게에 들어서는 사람은 드물었다. 장사는 힘들어지고 기업도 덩달아 생산을 줄였다. 투자할 이유도 없어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악순환의 고리는 완성됐다. 플레게톤 강의 불길은 거세지고 있다. 그 강의 끝은 레테, 망각의 강으로 이어진다. 거기서 모든 것은 잊히고 다시 돌아오는 길은 없다. 스틱스 강은 곧 저승의 세계다. 이제 사람들에게 그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조급해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돈가방을 든 삼총사를 돈으로 이길 수 없었다. 결국은 정치였다. 신예 정당이 나타났다. 시리자(Syriza). 비현실적일 만큼 붉은 홍조를 띤 그들의 체구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조그마했다. 그들이 말하기 시작하기 전까지 모두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그들은 삼총사에 맞서 싸우겠다고 했다. 강물을 거슬러 가자고 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치 오랜 망각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광장으로 모여 힘을 모았다. 그리스 바깥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렸지만, 삼총사의 싸늘한 웃음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이었다. 차근차근 따져보았다. 삼총사는 누구를 위해서 왔나. 누구를 도우려 한 것인가. 그리스 시민인가, 아니면 그리스 국채를 손에 들고 불안해하는 채권자들인가. 왜 화살이 서민에게 겨눠졌는가? 탈세와 부패로 점철된 정치인, 고급 관료, 과점 기업, 초부유층이 왜 과녁을 피해 있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15년 1월25일. 40대 젊은 지도자가 이끈 시리자가 플레게톤 강에서 표류하는 배에 올랐다. 뱃멀미에 지친 시민들은 환호했다. 환호한다는 것, 이 또한 오랜만이다. 하지만 역류가 쉬운 일은 아니다. 잠시 돌이킬 수는 있겠지만, 그 강이 시작된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선장이 바뀌고 표류하는 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어디선가 시작해야 할 일이다. 누군가 말했다. “재난은 말할 수 없이 고요했습니다. …환난이, 또 한 시절이, 이렇게 적막할 수 있다니요.”(함성호, ‘고요한 재난’) 더 이상 고요할 수는 없다.
긴 여정 끝에 아케론 강에서 빠져나오는 그리스를 상상해본다. 그 강 끝에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강이 이어졌으면 한다. 어려운 삶에서도 희망과 꿈을 돌이켜볼 수 있는 방죽이 있는 강이었으면 한다. 이뤄지지 못한 꿈은 거짓인가? 브루스가 물었다. 거짓이다. 하지만 그런 거짓조차 없는 삶은 곧 모든 것이 소멸된 스틱스 강의 세계다. 그래서 그리스에서 꿈의 항해가 계속되길 바란다. 브루스의 여동생 ‘매리’의 실제 이름은 ‘지니’다. 아이를 셋이나 낳고 손자도 있다. 17살에 만나 도주해 결혼한 남편과 여전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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