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이긴 했는데 안 줄더라. 씁쓸한 다이어트 체험기가 아니다. 정부가 지난 10월13일 공개한 ‘제2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에기본·2010~2030년)’ 초안 이야기다. 에기본은 말 그대로 우리나라 에너지 정책의 밑그림으로 삼는 장기 계획이다. 국가 에너지의 ‘포트폴리오’라고 할 수 있다. 20년을 내다보며 짜는 에기본에는 석유·가스 등 화석연료의 비중을 어떻게 둘지, 원자력·신재생에너지 등 전력 체계를 어떻게 짤지 등의 내용이 담긴다.
에기본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건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6년이다. 1960년대 이후 발전소를 세워 전력을 공급하는 데 급급했던 탓에 장기적인 에너지 계획을 짤 여유가 없었다. 한동안 석탄연료 의존도가 높아지고, 석유파동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에기본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당시에는 10년 단위로 큰 계획을 짜고, 5년마다 수정하는 방식이었다. 2002년, 2007년 이렇게 5년 단임제 정부에 맞춰 수립됐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에는 에기본 수립 방식도 바뀌었다. 기존에 10년 단위로 세우던 계획을 20년으로 늘렸다. 이명박 정부는 석유·석탄 등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고, 원전을 전체 발전설비 가운데 41%까지 늘리는 내용을 담은 ‘제1차 에기본’을 내놓았다. 이른바 ‘원전 르네상스’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에너지 정책에 대해 별다른 방향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박근혜 정부가 내놓을 에기본에 대한 궁금증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나온 박근혜 정부의 에기본 초안은 학계·산업계·시민단체 등 60여 명으로 짜인 ‘민관 합동 워킹그룹’이 내놓았다. 그동안 정부 관료가 중심이 돼 주도적으로 짜왔던 방식과 다른 큰 변화였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올해 초 국내에서 벌어진 원전 비리 등으로 공론화의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워킹그룹이 다섯 달 동안 분야별 토론을 거쳐 내놓은 보고서에는 2035년까지 우리나라의 원전 비중(발전설비 기준)을 이명박 정부가 짰던 제1차 에기본의 41%보다 낮춘 22~29% 수준에서 결정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문맥만 보면, 사실상 ‘탈핵’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환경단체 등에서는 “원전 비중은 줄지만, 원전 수는 사실상 줄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에기본이 ‘마술’이라도 부린 걸까.
‘탈핵 착시효과’가 나타난 이유는 이렇다. 에기본 초안에는 앞으로 늘어날 전체 전력 수요 전망치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분모가 다른데, 분자값만 달라졌다고 어떻게 줄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뜻이다. 김제남 정의당 의원이 에기본 초안을 바탕으로 원전 설비 규모를 분석해보니, 2035년 원전 설비 비중이 22%이면 원전 35기가, 29%가 되면 41기까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분석은 산업통상자원부가 국회에 제출한 ‘최종에너지 수요전망 기준안’을 바탕으로 계산했다. 결국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원전 23기에다 적어도 12~18기를 더 지어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원전 비중은) 줄였지만, (원자로 수는) 줄지 않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에기본은 10월 중순 공청회를 거쳐 올해 말 최종 확정된 정부안이 나온다. 여전히 논쟁 중이라는 뜻이다. 그 논쟁 안에는 원전 안전성, 송전탑 갈등, 여름철 전력 대란 등을 푸는 실마리가 있을지 모른다.
김성환 hwa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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