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 법원에서는 ‘세기의 특허 소송’이 진행 중이다. 바로 삼성전자와 애플 사이의 특허 본안 소송이다.
애플이 증인으로 채택한 공인회계사는 애플이 삼성전자의 특허침해로 입은 손실이 최소 25억달러(2800억여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2010년 중반부터 올해 3월까지 삼성전자가 특허침해로 판매한 스마트 기기가 2270만 대고 판매액은 81억6천만달러라는 것이다.
‘지식’ 아닌 ‘재산’에 방점
특히 애플 쪽은 디자인 관련 지식재산권 침해를 지적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의 제품이 터치스크린과 홈버튼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변화해왔는데, 이게 바로 애플의 아이폰과 아이패드 방식을 따라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삼성 쪽은 통신 관련 실용특허로 맞서고 있다. 애플의 아이폰4를 비롯해 아이폰3G, 3GS 등에 탑재된 iOS4와 iOS5가 삼성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것이다.
삼성 쪽의 방어 논리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애플의 디자인과 기술이 전적으로 애플의 것이 아니라는 논리다. 모두 선행 기술이 있다는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삼성 제품의 디자인은 삼성의 디자이너가 직접 했다는 논리다. 왕지연 삼성전자 수석디자이너는 증인으로 나와, 삼성의 디자인은 수백 명의 디자이너가 매달려 직접 만든 것이며 본인은 장시간 디자인에 매진하느라 갓 태어난 아기도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애플은 프랜드(FRAND) 조항으로 삼성전자 통신특허 공세를 비켜가는 전략을 세워두고 있다. 프랜드 조항은 기업의 특허가 기술표준이 되면, 해당 특허권자는 다른 회사들이 로열티를 내고 사용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원칙이다. ‘공정하고(Fair), 합리적이고(Rational), 비차별적’(And Non-Discriminatory)의 줄임말이다. 이미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서는 삼성전자가 특허권을 내세워 프랜드 원칙을 침해하며 공정한 경쟁을 방해했는지 조사하겠다고 나선 상태다.
이 ‘세기의 재판’은 전세계 미디어의 주목을 받고 있다. 내 손안에 있는 스마트폰을 놓고 벌어진 다툼이라 일단 세계인의 관심을 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디어 재산권을 놓고 다투는 모습도 흥미롭다.
그런데 어쩐지 씁쓸하다. 창조와 혁신으로 가득해야 할 것 같은 아이디어 경쟁이 돈잔치로 전락한 것 아닌지 하는 걱정 때문이다. 애플은 이번에 삼성의 특허침해에 따른 손실 비용을 산정하는 데만 20억여원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작업에만 프로그래머 20명, 회계사, 통계학자, 경제학자 등을 고용하느라 그렇게 돈이 들었다는 이야기다. 두 회사의 소송 비용을 모두 합하면 4천억원 규모라는 추산도 나온다.
이 정도 되면 특허는 아이디어나 기술의 영역을 한참 벗어났다고 봐야 할 듯하다. 아이디어나 기술로 시작하되, 자본이 없으면 만들기도 지키기도 거의 불가능해진 게 바로 특허권이다. 특허권·상표권·저작권 등을 포괄하는 ‘지식재산권’은 이제 ‘지식’이 아니라 ‘재산’에 방점이 찍힌 권리가 된 것 같다.
특허란 원래 기술 공유를 촉진하려고 고안된 제도다. 기술이나 지식을 독점하도록 만들어주는 제도가 아니다. 이런 취지를 잘 알지 못하고 특허가 절대적 권리인 것처럼 생각하는 건 오해다.
어떤 사람에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겼을 때 그 아이디어를 사회가 잘 활용하려면 그 사람이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받아 활용하며 더 발전시킬 수 있다.
사람 없고 특허만 있는 기업 된 코닥
그러나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지식 소유자가 타인에게 아이디어를 나눠줄 이유가 없다. 그래서 도입된 게 특허제도다. 아이디어나 기술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에게 제한적인 소유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대신 소유권을 가지려면 공인된 기관에 아이디어를 내놓아야 한다. 그게 바로 특허출원 절차다. 그리고 공인된 기관은 모든 사람에게 아이디어 내용을 공개하고, 사용할 경우 적절한 경제적 비용을 소유권자에게 지불하도록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사회의 자산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삼성-애플 소송전을 보면, 특허제도는 이제 지식 공유가 아니라 지식 독점을 위해 존재하는 제도가 돼버린 것 같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의 이토 조이치 소장은 “현재의 특허 시스템은 완전히 무너졌다”며 이런 현상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MIT 미디어랩은 전세계에서 기술로는 가장 앞서 있다는 MIT의 연구실이다. 당연히 중요한 기술 특허의 원천이기도 하다. 특허는 원래 연구와 투자에 대한 보상을 해 혁신을 촉진하려고 도입됐는데, 특허를 내고 지키는 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거대기업들의 머니게임의 장이 돼버렸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특히 변화가 빠른 소프트웨어 등 무형의 분야는 특허가 혁신을 촉진하기보다는 오히려 지체시킬 가능성이 높다. 신약 개발이라든지 화학같이 대규모 투자가 필수적인 영역이라면 특허가 제 기능을 할 수도 있다. 어차피 투자를 할 수 있는 거대기업이나 기관이 그 연구를 해서 특허를 확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삼성과 애플 소송의 핵심을 보면, 대부분 반짝이는 아이디어 성격이 강한 특허권을 놓고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한때 세계 최대 필름사업자로 이름을 날렸던 이스트만코닥의 최근 모습을 보면 특허제도의 딜레마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코닥 역시 애플과 소송전을 진행 중이다. 코닥이 보유한 디지털카메라와 스마트폰 화면에서 사진을 미리 보게 하는 기술 관련 특허 등을 애플이 자기 것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코닥은 이미 파산한 기업이다. 한때 10만 명에 이르던 직원이 1만7천 명으로 줄었다. 애플과의 카메라 경쟁에서 져서 2만8천 명을 해고해야 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고 나서 코닥은 보유 중인 1100개의 특허와 브랜드를 남겨 이를 팔고 임대하는 사업자가 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특허라는 게 사람이 가진 아이디어와 지식을 유형자산화한 것인데, 정작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해고하고 특허만 남아 앙상한 기업이 돼버린 것이다.
사람은 없고 특허만 있는 기업은 첨단 기업일까, 아니면 ‘좀비 기업’일까? 아이디어와 기술은 원래 사람의 두뇌에서 나오는 것인데, 두뇌도 없는 ‘기업’이라는 법인격이 이런 아이디어와 기술을 거액을 들여 서류상 자신의 자산으로 만드는 현실은 정당한 것일까? 어떤 아이디어도 사회에 있는 다른 아이디어에서 한 걸음 발전한 것일 텐데, 그 한 걸음을 더 내디딘 공로는 사회 전체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개인에게 있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그 개인을 고용하고 투자한 기업에 있는 것일까? 의문은 끝이 없다.
애플, ‘밀어서 잠금 해제’ 특허 취득
애플은 지난해 아이폰의 ‘밀어서 잠금 해제’ 기능 특허를 취득했다. 이에 맞서 구글도 조금 다른 내용의 ‘밀어서 잠금 해제’ 기능 특허를 출원했다. 옛 조상들은 집 대문 빗장을 ‘밀어서 잠금 해제’하며 살았다. ‘밀어서 잠금 해제’는 누구의 소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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