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은 무엇일까? 수학자의 답은 이렇다. “코끼리를 미분하고 냉장고를 적분해서 넣는다.” 대기업 경영자의 답은 이렇다. “외주 주면 된다.” 오래된 농담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자의 답은 이렇다. “냉장고 관련 규제를 철폐한다. 그러면 경쟁에 의해 코끼리를 넣을 수 있는 냉장고가 반드시 등장한다.”
냉장고 대형화, 대형마트 성장과 맞물려
어쩌면 이 농담은 생각보다 빨리 현실이 될지 모르겠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냉장고 크기 경쟁 덕이다. LG전자가 7월16일 사상 최대 용량인 910ℓ 냉장고를 8월에 내놓겠다고 미리 발표했다. 삼성전자가 7월4일 세계 최대인 900ℓ짜리를 먼저 내놓은 다음이다. 한국 기업들끼리 세계 최대 냉장고 기록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한 달여 만에 잇따라 경신하는 개가를 올린 셈이다.
1997년 5월 출시된 삼성전자의 지펠 양문형 냉장고는 670ℓ 용량이었다. 1998년 9월 나온 LG전자의 디오스 양문형은 760ℓ였다. 800ℓ가 넘는 냉장고는 10년이 넘게 지난 2010년 3월에야 나온다. 그런데 2년 만에 900ℓ를 돌파한 것이다.
최신 냉장고만 커지는 게 아니라, 전체 냉장고 면적 자체가 빠르게 커지고 있다. 집집마다 더 큰 냉장고를 들여놓고 있는 것이다. 1995년 600ℓ 이상 대용량 냉장고 판매율은 전체의 3%에 지나지 않았는데, 2009년에는 41%가 됐다. 이미 가전업계에서는 2012년 판매량 중 800ℓ급이 전체의 4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게다가 냉장고를 2대 이상 보유한 가구가 늘고 있다. 1995년 처음 시장에 얼굴을 내민 김치냉장고가 시작이었다. 김치냉장고는 한 해 1조원 이상 규모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업계 조사로는 이미 가구 보급률이 90%에 다다랐다. 사실상 대부분의 가정이 김치냉장고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다 최근 입주한 아파트에는 붙박이형 냉장고까지 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 갖고 있던 냉장고와 김치냉장고를 들고 이사를 가서 3대 이상의 냉장고를 지닌 집도 생겨나고 있다.
가구당 가족 수는 거꾸로 점점 줄고 있다. 통계청 집계로 1980년대 평균 가구원 수는 4명이었는데, 1990년대는 3명대, 2010년엔 2.7명까지 감소했다. 그런데 냉장고는 점점 대형화하고 가구당 개수도 늘어난다. 1인당 냉장고 면적은 최근 20여 년 동안 두 배 이상 늘었을 것 같다.
그런데 한국인이 냉장 또는 냉동해둔 음식물과 식재료는 왜 이렇게 많아지고 있을까? 사람이 먹는 식사량이 두 배로 늘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음식물과 식재료의 가정 내 보관 기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냉장고가 커지면서 오히려 덜 신선한 음식을 먹게 된다는 이야기다. 냉동실 깊숙한 곳을 뒤지다가 몇 달 전에 샀던 식재료를 꽁꽁 언 채로 발견하는 경험은 이제 낯설지 않다. 냉장고 크기가 300~400ℓ이던 때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장면이다.
공교롭게도 본격적으로 대형 냉장고가 사용되기 시작되는 시기는 대형마트가 급성장하는 시기와 맞물린다. 1993년 이마트가 첫 점포를 열며 대형마트가 한국에 들어선다. 그 뒤 2000년까지 대형마트 점포는 전국 171개로 늘었고, 2010년에는 437개까지 급증한다. 매출액도 2000년 10조6천억원까지 늘었다가, 2011년 36조6천억원으로 커진다. 김치냉장고가 등장한 1995년과 대형 냉장고 사용이 본격화한 1990년대 후반 시기가 대형마트 성장기와 맞물린다.
“불가능 없는” 자본주의의 위대함
냉장고의 대형화와 1가구 2냉장고 시대, 대형마트 급성장이라는 현상을 종합하면 한국인의 소비생활 패턴이 극적으로 변화한 경로를 짐작할 수 있다.
동네 정육점과 구멍가게에서 고기와 채소를 사던 1990년대 초·중반까지 대형 냉장고는 사치품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많은 가계가 당일 산 재료를 당일 조리해 식사를 하는 소비생활 패턴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말에 대형마트에 가서 일주일 먹을 식량을 대거 구입해 돌아오는 2012년 대형 냉장고는 필수품이다. 최소한 일주일치를 저장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골목상권 붕괴와 냉장고는 이렇게 만난다.
어찌 보면 우리는 유통업체들의 물류창고 역할을 떠맡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과거에는 동네마다 있던 구멍가게에 있어야 할 냉장고를 가정으로 들여놓고 있는 꼴 아닌가. 그러고 보니 대형마트로 가서 많은 식료품을 싣고 오는 승용차는, 과거 중간 물류창고에서 동네 구멍가게로 배달하던 트럭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꼴이기도 하다.
에너지 문제로 들어가면, 가전업체들의 기술개발 패턴은 값싼 전기료와 맞물려 소비자가 대형 냉장고를 선택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든다. 최근 나오는 대형 냉장고는 절전 기술이 여러 가지 적용되고 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구형 소형 냉장고보다 전기료 부담이 오히려 적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소형 냉장고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려는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한국은 구조적으로 에너지 다소비국이다. 인구는 5천만 명으로 25번째인데 석유 소비는 세계에서 8위, 전력 소비는 세계 9위다. 가정의 1인당 에너지 소비는 일본과 비슷한 수준인데, 소득은 일본이 두 배다. 줄일 수 있는 에너지 소비를 줄이지 않는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 1인당 냉장고 면적 증가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위대하다. 냉장고 사느라 쓴 돈을 채워넣느라 과로한 사람들은 주말이면 대형마트에서 신용카드를 흔들며 냉장고에 넣을 물건을 사들이며 그 피로를 푼다. 그리고 그 카드값을 채워넣느라 다시 과로를 한다. 과로해도 채워넣지 못하는 만큼을 채워넣기 위해 사람들은 다시 냉장고 만든 기업과 대형마트를 운영하는 기업의 주식에 투자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게 자본주의다. 어느 스포츠용품 광고처럼 그야말로 ‘불가능은 없다’(Impossible is nothing)이다.
작은 냉장고를 사용하는 생활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동네에서 식료품을 매일 사다 먹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골목상권이 살아나야 한다. 경제민주화 이슈가 여기 걸린다. 또 동네에서 쇼핑하려면 매일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내야 하니, 일찍 퇴근하는 직장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내 최고 수준의 평균 근로시간을 개선해야 하는 이슈가 걸린다. 냉장고는 이렇게,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함축해서 보여준다.
냉장고에 들어갈 코끼리도 팔까?
잇따른 ‘세계 최대 냉장고’ 발표 즈음 조간신문에는 냉장고 전면 광고가 집중적으로 게재됐다. 코끼리가 들어갈 만한 냉장고를 팔고 나면, 그 뒤에는 냉장고에 들어갈 코끼리를 대형마트에서 팔게 되는 것은 아닌지. 코끼리 다음에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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