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칼럼은 돈 이야기에 집중될 위험이 크다.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경제가 ‘살림살이’의 문제가 아니라 ‘돈벌이’ 문제라는 잘못된 확신만 강화하는 죄를 저지를 수 있다. 이 칼럼 제목을 ‘돈보다 밥’이라고 정한 뜻은 돈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우리와 우리 주변 이웃들의 살림살이라고 말하고 싶어서였다. 지난 두어 번의 칼럼에서 뉴욕 증시와 미국 회계 관행 이야기를 풀어놓았으니 이제 ‘돈’이 아닌 ‘밥’ 이야기로 가볼 때가 된 듯하다.)
금연 투쟁으로 각고의 나날을 보내던 중 서울 종로3가 한복판에서 불현듯 견딜 수 없는 흡연 욕구의 엄습에 딱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한 갑을 샀다가는 20개비를 다 피우게 될 것이 아닌가.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가치담배’, 즉 담배 한 갑을 뜯어서 개비당 얼마씩 파는 담배였다. 1980년대 돈 없는 불량 청소년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제대국 대한민국에서는 모두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역시 이 종로통 틈새 가게에는 아직 남아 있었다. 냉큼 달려가서 가격을 물었더니 200원이란다. 20개비들이 2100원짜리 ‘디스 플러스’니 무려 100%의 마진이라는 어쭙잖은 속셈과 함께 1천원짜리를 들이밀었더니 담배장수 할아버지는 뜻밖의 반응을 보이신다. 일단 나를 한 번 아래위로 꼬나보신다. 퉁명스레 800원과 담배 한 개비를 건네주고 나서 “이제 안 팔아!”라고 소리를 지르며 가치담배통을 가게 안으로 던져버리신다.
왜 심통이 나셨을까? 한참 달래어 겨우 들어보니, “이건 돈 없는 할배·할매들 피우라고 파는 거야. 멀쩡하게 젊은 놈이 뭐야.” 그렇다. 한마디로 “재수 없었을” 것이다. 종로3가의 노인들, 낙원상가 옆 1500원짜리 해장국으로 식사하고 콜라텍에서 노닐다가 어쩌다 운 좋으면 그 옆 순댓국집에 서넛이 모여 1만원에 돼지 수육과 막걸리로 잔치 여시는 분들에게 매일 2500원 담뱃값은 큰 부담이다. 그런 이들이 어쩌다 주머니 동전을 털어 한 개비 피우라고 내놓은 가치담배를 희멀건 젊은 놈이 금연 전략 어쩌고 하는 같잖은 이유로 사서 피우는 꼴이 어땠을까. 백배사죄하고 냉큼 한 갑을 샀더니 내 손을 꼭 잡으며 “사장님(!), 소리 질러 미안해” 하며 웃으신다.
화폐의 순환을 혈액순환에 비유하는 것은 서양 경제학에서 오랜 전통을 가진 습관이다. 하지만 일단 심장 판막을 지나고 나면 손끝 모세혈관까지 거침없이 이어지는 혈액순환과는 달리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화폐가 임자를 바꿔 남의 손으로 흐를 때마다 그야말로 피 말리는 푸닥거리가 벌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쉽게 잊혀진다. 그래서 인체의 경우 목에서 잡으나 손목에서 잡으나 맥박 수가 동일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에서 화폐순환은 계단식 논을 닮아서 위쪽 논은 흥건하고 아래쪽 논은 거북이 등처럼 바짝 말라 갈라지기 일쑤다. 종로 거리의 허름한 할아버지 주머니에 1만원짜리 몇 장을 찔러준 달동네의 며느리는 또 이 화폐순환의 위계 서열 어디쯤 있을까. 아마도 종로의 가치담배 가게는 서울에서 화폐순환의 끄트머리일 것이며, 이곳에서 화폐순환은 동상으로 피가 잘 통하지 않게 된 발가락의 혈액순환처럼 찔끔찔끔 이뤄진다. 을지로의 백화점에서는 1억원짜리 시계를 팔고 종로에서는 200원짜리 가치담배를 판다.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이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현재의 세계적 경제위기가 이 꺼멓게 죽어가는 발가락에 가져올 결과다. “허리띠를 졸라매자”고들 한다. 이 말은 사회 최상층에서 최하층까지 모두 고르게 혁대를 한 구멍씩 줄이자는 뜻이 아니다. 자본주의 질서에서 이 말은 지금까지 말단 지엽으로 그나마 흘러 들어가던 화폐의 흐름부터 우선적으로 잘려나가게 될 것임을 뜻한다. 지난주 미국에서 남성과 여성의 실업률 격차가 2차 대전 이후 최고치에 달했다는 통계가 나왔다. 역시 ‘만만한’ 쪽인 여자들이 경기 침체의 예봉에 쿠션이 되고 만 것이리라. 일자리를 잃은 어느 주부는 이제 아이들의 학습지를 끊게 될 것이다. 학습지 아주머니는 자기 집에 오는 파출부 아주머니를 끊을 것이다. 파출부 아주머니는 시아버지께 드릴 담뱃값을 끊을 것이다. 시아버지는 종로에 우두커니 서서 가치담배를 피우게 될 것이다. 여전히 드높게 번쩍거리는 백화점과 증권사 빌딩을 바라보면서. 발가락이 아프다.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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