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미국 뉴욕 증시에는 기묘한 널뛰기가 벌어졌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실적 발표가 있던 4월20일 주가가 하락했다가 바로 다음날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의 발언 직후 반등하면서 결국 6주째의 상승 행진으로 끝이 났다. 변화무쌍과 제행무상이야말로 주식시장의 성격이니, 하루 내려가고 하루 올라가는 것이 무에 그리 ‘기묘한’ 일이라는 것인가. 문제는 주가 하락의 원인이 된 BOA의 올해 1분기 실적의 내용이 손실은커녕 21억달러의 순익이었다는 것이다. 이 발표가 나온 직후 BOA의 주가도 폭락하고 주요 은행 등의 금융주들이 함께 떨어지면서 전체 주가의 하락을 주도했다. 실로 얄궂다. 순익을 내도 주가가 폭락한다면, 반대로 같은 액수의 손실이라도 냈어야 속이 시원했다는 말인가.
어쩌면 그랬을지 모른다. 차라리 BOA가 상당한 손실이 났지만 그것이 애초에 사람들이 걱정했던 수치보다는 훨씬 양호한 숫자라는 것이 판명났다면 오히려 이런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기묘한’ 사태의 원인은 무엇인가?
올해 1분기 실적 발표를 앞두고 미국 정부와 회계 당국은 ‘시가 회계’의 원칙을 저버리고 일종의 편법을 도입한다. 현재 미국의 각종 자산시장은 바닥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특히 지금 큰 문제가 된 각종 파생상품들과 유동화 증권들이 그러하다. 만약 은행들보고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들을 모두 이렇게 바닥에 처박힌 시가로 평가해 회계장부에 계상하도록 한다면 성할 은행이 거의 없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정부가 국유화로건 배드뱅크로건 투입해야 할 공적 자금의 규모도 엄청나게 불어날 것이라는 걱정이다. 이에 위기에 몰린 은행 쪽과 납세자들의 거센 항의를 예측한 정치가들이 합심해 지금 시장이 저 모양이니 은행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자산을 ‘재량껏’ 평가할 수 있도록 하자고 회계 당국에 요구한 것이다. 효과는 놀라웠다. 지난해 4분기까지도 엄청난 손실을 보고했던 씨티·웰스파고 등의 큰 은행들이 단 3개월 만에 모두 순익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적어도 장부상으로는.
하지만 과연 이런 식의 ‘화장발’- 점잖은 말로 분식(粉飾)- 이 시장 바닥에 닳고 닳은 투자자들을 얼마나 속일 수 있을까? 세계경제가 급격히 회복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모든 은행들이 단 3개월 만에 실적이 그렇게 호전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이러한 편법으로 은행들의 자산 가치가 최소한 20% 이상 과대평가됐다고 말한다. 씨티를 필두로 한 은행들의 순이익 실적 보고에 투자자들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BOA까지 순익을 보고하자 아무래도 BOA는 물론 기존에 순익을 보고하고 주가를 올렸던 다른 은행들의 실적 발표도 모조리 믿기 힘들다는 비관론이 확산된 것이 이번 주가 폭락의 원인이라는 해석들이 많다. 결국 은행들의 실제 상태는 그들이 내놓은 회계장부로는 알 길이 없고, 5월4일로 예정된 ‘스트레스 테스트’의 결과 발표를 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이트너의 발언은 이 점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현재 진행 중인 은행들의 스트레스 테스트를 대부분의 은행들이 거뜬히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는 발언을 흘린다. 주가는 반등했지만, 불안의 여지는 남아 있다. 누군가 말했지만, 만약 가이트너의 말대로 모든 은행들이 테스트를 통과해버린다면 그 테스트 결과는 또 누가 믿겠는가? 낙제생도 낙방생도 없는 졸업·입학 시험이라면 누가 그것을 의미 있다고 하겠는가? 만에 하나 정부가 자세한 내막이나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채 그저 19개 주요 은행들이 모두 훌륭한 상태에 있더라는 식으로 슬쩍 넘어가려 한다면, 그 테스트 또한 지금까지의 ‘재량껏’ 만들어진 1분기 실적 발표나 마찬가지로 시장 사람들의 불신만 조장하고 말 위험이 크다.
우리는 참으로 기묘한 사태를 목도하고 있다. 30여 년 전 미국의 회계 당국은 회계의 목적이 단순한 장부 기입이 아니라 투자자들의 의사 결정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외치며, 따라서 시가 회계를 선호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이제 바로 그 미국의 회계 당국이 그 시가 회계의 원칙을 저버리고 오히려 시장 투자자들의 불신과 의혹만 키우는 회계 방식을 채택했다. 도대체 그토록 외쳐오던 시장의 투명성은 어디로 갔는가. 그 원칙은 오로지 ‘시장 상황이 좋을 때’에만 국한되는 것인가. ‘시장 자본주의’의 원칙은 현재의 위기 속에서 점점 요지경과 미궁 속으로 한발한발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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