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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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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용기다

등록 2008-07-10 00:00 수정 2020-05-03 04:25

처지에 맞는 목표를 정하고 재무설계를 짰다면 남 눈치 보지 않고 용감하게 밀고 나가야

▣ 이광구 포도재무설계㈜ 재무상담사 nari@phodo.com

재무 상담을 받은 고객 중에 철학박사가 있다. 40대 주부들과 함께 ‘수다로 푸는 논어’라는 기치 아래 논어강독을 한다기에 함께하고 있다. 지난주 강독한 내용에 이런 구절이 있다. ‘지혜로운 자는 의혹하지 않고(知者不惑), 어진 자는 근심하지 않으며(仁者不憂), 용맹한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勇者不懼).’ 사리를 밝힐 지혜가 있기에 혹하거나 걱정하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을 것이란 대목은 쉽게 이해된다. 그런데 그 다음 해설이 문제가 됐다. ‘이는 학문의 순서다.’ 그런데 왜 ‘지, 인, 용’(知, 仁, 勇) 순서일까? 공자에게 ‘인’은 최고의 덕목이므로 맨 마지막에 ‘인’이 와야 할 텐데 왜 ‘용’일까? 의아했다.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는 말도 있잖아.” 아줌마들의 수다가 시작됐다. “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 용감하게 돌진해서 쟁취하는 것을 미덕으로 치켜세우던데요.” 미국 서부개척 시대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는 의견도 덧붙여졌다. “순서가 정말 지, 인, 용이라는 뜻 맞아?” 수다 끝에 실천의 문제가 끄집어내졌다. “이치를 배우고 삶의 철학으로 삼은 다음 실천해야 하는데, 실천에는 가치판단과 결단이 필요하잖아요. 그때 두려움 없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재무 상담을 하는 나에게는 쏙 와닿는 말이다. 정보를 주고 목표의식을 갖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필요자금을 얼마로 할 것인지, 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등이 모두 개인의 판단과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기에 정말 소신과 용기가 필요하다.

결혼을 앞둔 김인철(31·가명)씨에게도 마지막 설명은 역시 용기다. 수도권에서 집 사고 애 둘 키운다는 전제하에 대학자금과 결혼자금을 마련하고 60살에 은퇴해 월 150만원씩 쓰며 노후를 보낸다는 설계다. 소득이 많지도 않고 저축률이 높지도 않다. 모아놓은 순자산도 얼마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설계가 어렵다. 결국 목표를 낮춰야 하는데, 세심한 김씨가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상담 직전 김씨의 저축액은 월 50만원이었다. 첫 번째 상담을 하면서 저축을 100만원으로 늘려야겠다는 각오를 했고 소비성 지출을 줄이겠다고 했다. 연애 비용이 많이 드는 때인데,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다. 변동성이 큰 몇 개 항목만 목표로 설정한 엑셀파일을 건넸다. 며칠 뒤 김씨한테서 답신이 왔다. “한 달 쓸 돈 벌써 다 썼네요.” 그렇지만 두 번째 만났을 때 보니, 지출을 줄이는 것에 대한 피로감은 커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록하면서 자신이 푼돈을 얼마나 많이 쓰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놀란 점을 표현했다. “전에는 쓴 돈을 열심히 적기만 했는데, 이제 써야 할 목표를 정하고 매일 목표와 비교하니까 눈에 확 들어오던데요.”

김씨는 결혼하고 살 집은 현재 마련돼 있는 전셋집(4천만원)에서 시작하되 7년 뒤 1억6천만원짜리 장기전세주택 마련을 고려해보았다. 현재 서울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역세권 장기전세주택(SHIFT)이 잘 시행된다면 서민의 주거안정에 꽤 도움이 될 터다. 노후는 고향에 가서 보낼 생각이다. 현재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있는데, 최소한 노후에 살 집은 확보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렇지만 생활비는 준비해야 하는데, 60살에 은퇴해 90살까지 살 계획이라면 무려 15억원(60살 시점 가치)이나 마련해야 한다.

전셋집 외에 모아놓은 자산이 거의 없는 김씨에게는 현재 저축액 월 100만원으로는 이런 목표마저도 달성하기 어렵다. 목표와 조건을 과감히 바꾸는 용기가 필요했다. 핵심은 목표는 낮추고 조건은 빡빡하게 하는 것이다. 주택비, 자녀의 대학자금과 결혼자금은 낮추고 은퇴 시기는 늦추고 저축액은 늘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물가상승률까지.

그동안 나는 물가상승률을 3.5%로 잡았었다. 그런데 요즘 5%대까지 오르고 있다. 물가야말로 재무설계에 가장 부담을 주는 요소다. 그러나 개인이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물가도 결코 방법이 없지는 않다. 물가에 영향을 덜 받는 생활방식을 개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사지 않거나 덜 쓰는 방식이다. “어지간하면 차는 안 살 겁니다.” “맞아요. 둘째 낳기 전까지는 없어도 살 만하죠.” 나의 응수에 김씨 표정이 밝아졌다.

집 문제도 신부 될 사람과 얘기해봤는데, 도시는 답답해서 농촌 지역으로 가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부담이 많이 준다. 거기에 나는 자녀 대학자금을 줄이고 결혼자금은 대주지 않는 것이 결코 문제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부모가 그걸 소신껏 결정하고 자녀에게 어릴 때부터 애정을 표시하며 자립심을 키워주면 된다. “이제 흑자 흐름이네요.” 문제는 이제 김씨가 이렇게 인식한 설계안을 얼마나 과감하게 밀고 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설계안을 믿는다면 이제 남 눈치 보지 않고 용감하게 밀고나갈 일만 남았다.

‘온달 아빠의 돈 불리기’는 이번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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