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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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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문제, 도망가지 마세요

등록 2008-05-29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개인회생이나 파산제도 활용 못하는 사람들…적극적으로 헤쳐나갈 의지를 잃는 것이 더 문제</font>

▣ 포도에셋 재무상담사 nari@phodo.com

박미숙(39·가명)씨를 만난 건 지난해 가을이다. 네이버와 함께한 ‘부채 클리닉’ 캠페인에서 선정된 고객이었다. 중학생과 초등학생 자녀 둘을 데리고 사는 기초생활수급자다. 사업을 하던 남편이 망하면서 급기야 이혼까지 하게 됐다. 사업이야 흥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이 때문에 가정까지 엉망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10여 년 전 역시 망해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남 얘기 같지 않았다.

남편이 사라진 뒤에도 사업 실패의 흔적은 박씨를 괴롭히고 있었다. 남편이 부족한 사업자금을 대려고 박씨의 언니 이름으로 차를 샀다 팔았는데, 이 때문에 언니는 차를 써보지도 못하고 할부금을 내야만 했다. 박씨 이름으로 대출받았던 빚도 고스란히 남았다. 채권자는 카드사 두 곳과 새마을금고 한 곳이었다. 이 가운데 한 카드사에만 월 10만원씩 갚고 있었다. 다른 두 곳은 아직 연락이 없다고 한다.

“이거 갚지 마세요.” 국가에서 주는 최저생계비로 사는 마당에 무슨 빚 상환이냐고 다그쳤다. 파산제도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변호사 비용을 댈 형편도 아니고 정말 파산 신청을 하면 빚이 완전히 없어지는지도 확신하지 못하던 중이었다. 잘 아는 변호사 사무실에 부탁해 실비만 내고 파산 신청을 하도록 안내했다. 그리고 6개월쯤 지난 즈음에 법원 판결을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이제 몇 달을 더 기다려 면책선고까지 받으면 박씨는 빚 문제를 청산하게 된다. 적은 액수이지만, 빚 갚는 데 쓰던 월 10만원이라도 자녀교육비를 위해 저축하는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경기도에서 자영업을 하는 최충환(43·가명)씨는 10년 전 친척이 망하면서 보증 빚 때문에 아직도 고생이다. 최씨는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소득신고를 할 수 없는 형편이다. 7년 전부터 시작한 자영업이 그래도 이제는 조금 자리를 잡았다. 사업자 등록은 부인 명의로 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사업을 키우면서 자금이 많이 부족했다. 아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는 것도 이제 거의 한계에 도달했다. 부인 명의로 사업을 하기는 하지만 최씨 때문에 제1금융권 대출은 불가능했다. 다행히 A캐피털로부터 연 10% 이자로 급한 자금을 대출받았다. 그런데 계속 사업은 확장될 것이고, 앞으로 20년 정도는 경제활동을 해야 할 여건이기에 신용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놓는 게 필요했다. 게다가 최씨는 등록된 장애인이기 때문에 사업자금 대출을 일반인들보다 유리하게 받을 수 있다. 파산 신청이 가능한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일주일 뒤에 만난 최씨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부인 명의이긴 하지만 이미 부채 이상의 자산을 모아놓은 상태라 법원으로부터 파산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회생과 파산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던 2004년 즈음에만 신청했더라도 어렵지 않게 파산 선고를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원칙대로야 자산이 생겼으니 그것으로 빚을 갚으면 된다. 그러나 자가 주택도 없고 팔순 노모를 모시고 두 자녀를 키우는 최씨 부부가 10년을 고생해 이제야 겨우 먹고살 기반을 마련했는데, 그것을 10년 전의 보증 빚을 갚는 데 다 써야 한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다.

박씨나 최씨 모두 자신의 빚 문제를 혼자 해결하거나 도피하는 방향으로 끌고 갔다. 개인회생이나 파산제도를 제대로 알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더라면 마음고생도 덜하고 훨씬 빨리 재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그런 제도를 잘 모르는 것보다, 자신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헤쳐나갈 의지를 잃는 것이 더 문제다. 꼭 학력과 지식이 짧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8년 전에 부도를 낸 김창식(49·가명)씨는 일류 대학 출신이고 그전에 10년 정도 사업을 잘 이끌어오던 사람이다. 당시 1억원 가량 빚을 졌는데, 그냥 방치했다. 아는 사람 회사에 비공식적으로 다니고 있는데, 최근 날아온 독촉장들을 확인해보니 빚이 무려 3억원이 됐다고 한다.

“진작 파산 신청을 하시지 그랬어요?” 김씨는 좀 엉뚱한 대답을 한다. “이 나이에 얼마나 더 사회생활을 한다고….”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직 경제활동을 할 시간이 많이 남았다. 정상으로 되돌려놓고 다시 재기하는 게 옳다. 은둔자처럼 사는 것은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 빚은 사람의 희망을 갉아먹는 주범이다. 빚이 많아지면 대부분 삶의 의욕을 읽고 자포자기하게 된다.

그런데 빚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미래에 받을 국민연금을 담보로 현재 빚을 갚도록 하겠다는 정책을 내놓는 건 참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라도 해서 신용불량 상태에서 빨리 탈출하라는 뜻이라는데, 그게 당사자들의 재기에 도움이 되기보다 채권기관만 확실하게 빚을 받아내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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