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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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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위기의 연인들이여 오라’

등록 2003-02-27 00:00 수정 2020-05-03 04:23

의 가슴저린 사연을 품고 있는 오타루와 눈의 도시 삿포로 여행이 남긴 강렬한 여운

데스크와 편집자에게 거듭 핀잔을 들을 정도로 마감을 미루고 미뤘건만 아직도 속시원히 풀리지 않는다. 일본 최북단의 섬 홋카이도 여행이 내게 남긴 강렬한 여운의 이유가 말이다. 어땠어 라는 주위의 물음에 “알프스나 로키 산맥도 갔었지만 그렇게 힘들여 멀리 가느니 난 이제 홋카이도를 가겠어”라고 자신 있게 말했어도 왜 그런지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다. 일단 ‘역설’이란 코드로 홋카이도의 느낌을 정리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영화 (각본·감독 이와이 순지, 1995년작)부터가 그렇다. 아주 예쁜 순정만화 같은 이미지로 아릿한 사랑의 추억을 자극하지만, 실은 무서운 이야기다.

일본적이면서도 유럽적인

죽은 지 2년이 지나도 옛 애인 후지이 이츠키를 잊지 못하는 히로코(나카야마 미호)는 그의 옛 주소로 안부편지를 보낸다. 지금은 그 집이 사라지고 국도가 되었다는데 유령 같은 답장이 날아온다(미스터리의 요건을 딱 갖췄다). 알고 보니 중학교 3년간을 같은 반에서 지낸 동명이인 이츠키(나카야마 미호의 1인2역)였다. 이츠키가 가진 또 다른 이츠키에 대한 추억을 편지로 주고받으며 이들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히로코는 이츠키가 자신을 사랑했던 이유가 첫사랑과 닮았기 때문이었고, 이츠키는 또 다른 이츠키의 첫사랑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너무 뒤늦게 깨닫는다. 길고 긴 시간과 죽음을 경유해 밝혀지는 이 진실은 생각할수록 난감한 사랑의 비극성이다. 개봉하기 전 ‘삐짜’ 테이프로 봤을 때, 개봉 뒤 극장에서 다시 봤을 때 ‘아~, 좋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딘가 묵직했던 건 그래서였을 거다. 게다가 내가 다닌 남녀공학 중학교의 도서실 풍경과 에서 중학생인 두 이츠키가 도서실에서 엮어가는 사랑의 기억이 너무나 비슷한 느낌이어서 왠지 가슴 한켠이 저리기까지 했다. 잊고 있던 와의 ‘인연’은 뜻하지 않게 이어졌다. 일본관광진흥회에서 한국 기자들을 홋카이도로 초청했는데 일정 중에 의 배경이 된 아담한 도시 오타루가 끼어 있었다.

이츠키가 사는 오타루는 삿포로에서 열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연인들의 명소로 일본적이면서도 유럽적인 특이한 느낌의 항구도시다. 역에서 나오는데 동행한 20대 후반의 일본여자 ㅁ씨(왜 익명인지는 조금 뒤 아시게 된다)가 “3~4년 전만 해도 이 역사나 거리가 모두 옛스러운 운치가 있었는데 자꾸 개발되면서 매력을 잃어간다”고 말하는 바람에 부푼 기대감이 한풀 꺾였다. 역에서 오른쪽 길로 10분쯤 걸어가니 에서 이츠키의 아버지와 이츠키가 차례로 실려오는 병원이 나온다. 실제로는 시청 건물이었는데 한숨이 나올 만큼 평범했다. 정문 골목 길의 단층 목조집들이 쌓인 눈으로 폭 파묻혀 있다거나, 시청 앞 마당에서 직원들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와 에 등장하는 예쁜 캐릭터들을 눈조각으로 만들고 있는 게 더 인상적이었다. 영화에서 이츠키와 히로코가 스쳐지나가던 사거리 역시 새로울 건 없었다. 택시기사가 비슷비슷하게 생긴 사거리들 가운데 정확히 그 장소를 짚어냈기에 알아볼 수 있었을 정도다.

“제가 동국대 사건 당사자예요”

오타루의 매력은 가 아닌 지금은 용도폐기된 운하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다. 2월이면 ‘눈등롱축제’가 열리는데, 운하의 물 위로 수없이 떠 있는 등이나 운하를 따라 난 길가에 눈으로 얼개를 만들어 그 안에 넣어둔 초들이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운하 끝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설산과 운하 양쪽에 늘어선 유럽식 건물까지 가세해 기막히게 ‘로맨틱한’ 공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혹 위기에 처한 연인이라면 이곳에 꼭 들를 일이다. 없던 사랑도 솟구쳐내줄 태세니. 조성모의 뮤직비디오에서 이영애가 점원으로 출연하는 오르골(뮤직박스관)을 시작으로 조그맣게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길 역시 만만치 않은 ‘내공’을 뿜어냈다.

인구 15만명의 도시에 해마다 800만명의 관광객이 찾아드는 이유는 충분해보였다. 여기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1923년 물자수송을 위해 건설된 운하는 패전 뒤 산업이 괴멸하면서 매립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자 1945년 한 주부의 반대운동을 계기로 시민들 사이에 운하를 보존하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무려 20년의 기나긴 투쟁 끝에 현재의 모습으로 남게 됐다. 그런데 운동을 벌인 시민들은 지금 무척 씁쓸해한다고 한다. 당시 경제적 이유로 매립을 추진했던 이들이 운하 주변으로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문득 운하 옆으로 줄지어선 거대한 옛 화물창고들이 레스토랑과 기념품점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오타루 취재를 위해 하룻동안 일행과 떨어져 지냈다. 대신 문화방송 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피디와 동행하게 됐는데, 그는 예쁜 외모와 세련된 스타일의 일본인 코디네이터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앞서 등장했던 일본인 ㅁ씨다. 도쿄나 삿포로보다 서울에 더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색다른’ 인물이었다. 삿포로에서 오타루로 가는 열차 안에서 피디가 잠시 조는 사이 그가 말했다. “김소희 기자 아시죠 김 기자님이 에서 저를 기사로 쓴 적 있어요” “예” “‘성역깨기’에요.” “예” “서강대 사건에 이어 문제가 됐던 동국대 사건 아세요” “아~, 예.” “제가 동국대 사건 당사자예요.” “예” “민망하시죠” “…예.”

동국대에서 강의를 들으며 알게 된 교수가 세미나차 삿포로에 왔을 때 ㅁ씨와 술자리를 가졌고 성추행 사건이 벌어졌다. 그가 문제를 제기해 한때 교수가 사표를 내는 등 원만히 해결될 기미가 보였으나 동료 교수들의 ‘지원’에 힘입어 유야무야되고 있었다. 그가 당한 일은 같은 한국인이자 남자인 나를 몹시 부끄럽게 했지만, 그는 보기보다 훨씬 단단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연병장에서 뛰노는 아이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3년이 되는데요. 그동안 한국의 교수사회에 많은 실망을 했어요. 고생 끝에 올라온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교수라는 인간들이 그 힘을 서로의 밥줄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니요. 가는 길마다 막혀버리고 지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가 이렇게 포기하지 않고 해올 수 있었던 건 그런 인간을 다시는 학생들 앞에 교수 이름으로 서게 하면 안 된다는 마음과 그에 동의해주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저는 이 일을 통해 많은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한국을 더욱 좋아하게 됐어요.”

ㅁ씨는 현재 민사소송을 진행 중이고 올 여름쯤에는 재판이 열릴 것 같다고 했다.

오타루에 가려면 삿포로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홋카이도의 행정수도지만, 그보다 유명한 건 동계올림픽을 개최했던 눈의 도시다운 눈축제의 명성이다. 가장 추운 2월이면 열리는 삿포로 눈축제는 올해로 54회째(2월5~11일)를 맞았다. 뜻밖에도 눈축제는 자위대 주둔지를 포함한 두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자위대 주둔지 그럼 병영 안에서…’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만 조그만 충격을 받고 말았다. 연병장 안에 전시된 거대한 눈조각들 때문이 아니었다. 2~3층 높이로 웬만한 건물 규모로 지어진 눈조각들에는 어김없이 얼음 미끄럼틀이 만들어져 있었고, 병사들은 아이들의 미끄럼 놀이를 돌보고 있었다. 아이들처럼 병사들의 표정도 밝고 미소로 차 있어서 동원인지 자원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젊은 여자들이 순찰 중인 군인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도 보였다. 한국 군대에선 상상조차 안 가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흘러넘쳤다. 일본 밖에서는 자위대를 은근한 위협으로 느끼는 나라가 적지 않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넓은 연병장은 그야말로 거대한 가족 놀이터가 돼 있었다. 이런 느낌은 오도리공원을 가득 메운 엄청난 수의 눈조각들을 보면서 조금 달라지긴 했다. ‘일·중 평화우호조약’ 25주년을 기념해 만들었다는 자금성은 5t 트럭 400대 분량의 눈으로, 막부 정치 400년을 기념해 화재로 사라진 에도성은 트럭 640대 분량의 눈으로 웅장하게 재현돼 있었다. 높이가 15m에 이르는 거대한 눈조각들은 죄다 자위대 작품이었는데, 군대라는 조직적인 힘이 아니고서는 쉽게 만들 조형물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삿포로는 눈축제의 도시가 아닌 삿포로 맥주와 여기서 탄생된 미소(된장)라면의 도시로 기억된다. 일행과 잠시 헤어져 113년 역사의 삿포로 맥주 공장을 찾아갔다. 온통 넝쿨로 뒤덮인 벽돌 건물 안에는 막 만든 삿포로 맥주를 양고기 철판구이(이 요리를 징기스칸이라 부르고 있었다)와 함께 파는 직영 레스토랑이 있다. 총지배인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 “아사히 맥주나 기린 맥주와 달리 삿포로 맥주는 긴 역사가 자랑이다. 삿포로 맥주를 상징하는 붉은 별은 처음 홋카이도 개발 임무를 띤 개척사의 깃발이었다. 그들의 임무 중에는 맥주 제조가 있었고, 그래서 이 회사는 처음에 국영이었다.” 그제야 떠올랐다. ‘참, 홋카이도의 원주민은 일본인이 아니라 아이누족이지…. 이들도 미국처럼 개척이란 말을 쓰는구나.’

하늘이고 땅이고 온통 하얀색

조정래 대하소설 에는 홋카이도로 끌려간 조선인 징용자가 목숨 건 탈출을 감행한 뒤 아이누족 마을에 숨어 살면서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미는 이야기가 나온다.

시라오이 아이누 민속박물관에 갔을 때, 한 아이누족 아저씨가 소설 속 상황과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고 ‘증언’해줬다. 명치시대에는 약 10만명의 아이누족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약 2만4천여명이 아이누족으로 등록돼 있다. 명치유신과 함께 시작된 오랜 동화 정책과 ‘개척’은 아이누의 언어도, 생활터전도, 사람도 잃게 했다. 아이누 사람들이 손수 만들어준 국과 떡은 우리의 그것과 신기할 정도로 맛이 비슷했다.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온천이 있는 노보리베쓰로 향하는 중에 평생 잊을 수 없는 눈보라를 만났다. 하늘이고 땅이고 온통 하얗게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 속을 버스는 신기하게도 잘만 달렸다. 가로등 대신 도로와 도로 아닌 곳을 구별해주는 표시판이 줄지어 서 있었고 기사는 그것만 보고 달렸다. 드디어, 눈을 맞으며 야외온천을 즐기는 사진 속의 장면을 직접 감행하게 됐다. 기분좋게 몸을 데우고 있는데 피디가 카메라를 들고 나타났다. 오타루에서의 인연으로 본의 아니게 그의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인물이 돼버린 뒤였다. “여기 온천 어때요” 카메라를 불쑥 들이대며 묻는데 당혹스러워서 버벅거렸다. 방으로 돌아와 거울을 보다 답이 생각났다. 2년 넘게 잘 걸고 다니던 목걸이가 그만 검붉게 변해 있었다. “이런 젠장, 여기 온천 정말 확실하네.”

홋카이도=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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