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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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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장터는 알지만 SM은 모르는 것

‘팬 경험 늘린다'면서도 팬들이 만드는 세계엔 무관심한 엔터업계
등록 2026-02-12 16:54 수정 2026-02-14 18:02
번개장터의 글로벌 서비스 ‘번장 글로벌’ 누리집 화면 갈무리.

번개장터의 글로벌 서비스 ‘번장 글로벌’ 누리집 화면 갈무리.


지난달 한 아이돌의 콘서트를 앞두고 중고거래 서비스 ‘당근’으로 공식 응원봉을 샀다. 응원봉 상자에는 약간의 생활 흠집이 있지만 실제 사용한 적은 없어 보였다. 정가의 약 50%로 거래를 마친 뒤에도 다음 주인을 기다리는 여러 아이돌의 포토카드, 인형, 키링(열쇠고리)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다.

또 다른 중고거래 서비스 ‘번개장터’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25년 국내에서 가장 높은 거래 건수가 발생한 카테고리는 ‘보이그룹 굿즈’였다. 이는 2위 ‘피규어', 3위 ‘남성 의류 상의'를 압도한다. 아이돌 굿즈를 사고파는 일이 어제오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시장은 때마다 다른 욕망의 방향을 가리켜왔다.

이를테면 번개장터에 새 매물이 등록될 때마다 알림을 받는 즐겨찾기 기능은 실제 거래와 상관없는 욕망의 증표다. 2024년 즐겨찾기 설정 순위 5위였던 ‘플레이브’(2023년 데뷔한 5인조 버추얼 보이그룹)는 2025년 3위로 상승했는데, 이는 버추얼 아이돌의 기세를 증명하는 지표다. 2025년 20~30대 이용자가 가장 많이 실거래한 보이그룹 굿즈는 플레이브와 ‘데이식스’(제이와이피(JYP)엔터테인먼트 소속 4인조 록밴드)였다. 케이(K)-밴드의 유행과 중고거래량이 정확히 포개진다.

문득 궁금해진다. 케이팝의 글로벌화에 발맞춰 국외 팬들도 우리처럼 뭔가를 많이 사고팔까? 국외 이용자가 한국 번개장터에 올라온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서비스 ‘번장 글로벌’(Bunjang Global)에 접속하자마자 보게 되는 건 다름 아닌 케이-위키(wiki) 용어집이다. 거기에는 한국인들이 중고거래 게시물을 작성하거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흔히 쓰는 용어들이 있다. 덕분에 국외 이용자들은 피치 못할 이유로 수많은 굿즈를 ‘geupcheo’(급처)1 하는 팬과 늦게 입덕해서 굿즈를 모으기 시작한 ‘neutdeok’(늦덕)2의 차이를 알아차린다. 또한 ‘kulgeo’(쿨거)3를 희망했으나 결국 ‘geopha’(거파)’4로 이어지는 경우를 보며 성숙한 중고거래 문화를 학습할 수도 있다.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 라이즈 멤버들이 직접 디자인한 캐릭터 ‘위 리틀 라이즈’가 등장한 뮤직비디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 라이즈 멤버들이 직접 디자인한 캐릭터 ‘위 리틀 라이즈’가 등장한 뮤직비디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는 얼마 전 공식 유튜브에서 공개한 2026년 미래 전략 발표에서 케이팝 팬덤을 위한 사업 방향성 중 하나로 아이피(IP) 사업 전략을 언급했다. 그들은 공연장에서 더 다양한 이벤트를 제공하고 온라인 줄서기와 선주문 기능 등을 강화해 아티스트 엠디(MD)의 구매 편의성을 높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에스엠이 정의하는 엠디란 “단순한 상품이 아닌 아티스트의 세계관을 경험할 수 있는 매개체”다.

라이즈 멤버들이 직접 디자인한 캐릭터 ‘위 리틀 라이즈'의 탄생 1주년을 기념한 팝업스토어에 1만2천 명 이상이 방문했고, 그 뒤 발표된 앨범 수록곡의 뮤직비디오에는 그 캐릭터들이 등장했다. 이 모든 건 에스엠이 자부하는 대표적인 아이피 활용 사례다. 그렇지만 에스엠이 제시하는 미래의 아이피 전략은 끝까지 팬이 아닌 공급자의 시선에만 머무른다. 팬 경험의 개선을 언급하면서도 정작 현재 그 경험의 맥락과 한계를 진단하는 시도는 없다.

현재의 번개장터는 팬들이 자발적으로 아이피를 소비하고 재생산하는 공간이 됐고, 국외 팬덤과 접촉점을 늘릴 방안을 실행한다. 그러나 에스엠은 여전히 시장에 상품을 대량 공급하는 전통적 접근 방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중고거래 서비스는 아는 걸 엔터테인먼트 기획사는 놓치고 있다.

 

1. 급처분

2. 아이돌의 데뷔 초반이 아니라 활동 중 늦게 입덕한 팬

3. 쿨한 거래, 지난한 조건 협상 없이 바로 이뤄지는 거래

4. 거래 파기

 

서해인 콘텐츠로그 발행인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케이팝을 듣습니다. 케이팝이 만들어낼 ‘더 나은 세계’를 제안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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