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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드, 케이팝 향만 내고 사라진 무대

세계 대중음악 전설들이 아이돌과 손잡고 대결 펼치는 ‘케이팝드’ 속 모호한 케이팝의 현주소
등록 2025-09-04 22:16 수정 2025-09-11 16:58
‘케이팝드’ 스틸컷. 애플티브이플러스 제공

‘케이팝드’ 스틸컷. 애플티브이플러스 제공


“제 손주들은 케이팝 팬이지만 할머니가 케이팝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어요. 이걸 알면 엄청 좋아할 거예요.”

애플티브이플러스의 경연 프로그램 ‘케이팝드’(Kpopped)에서 미국 솔(Soul) 음악의 거장 패티 라벨이 들려준 이 말은 케이팝이 세대를 통합하는 언어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할머니와 손주 사이의 유일한 공통분모가 케이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패티 라벨이 누구인가. 국내에선 ‘기치기치 야야’라는 가사로 잘 알려진 ‘레이디 마멀레이드’(1974)의 원곡자다. 그는 4년차 케이팝 걸그룹 빌리와 함께 자신의 원곡을 케이팝 스타일로 편곡한 노래를 부르는 경연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유튜브 역사상 최초의 10억 뷰를 달성한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 공개 이후 13년이 흘렀다. 뉴요커 칼럼니스트인 콜린 마셜은 ‘한국 요약 금지’라는 책에서 “한국인끼리만 통하는 농담 같은 내용을 음악에 담아 성공했다”며 놀라워했다. 노랫말에 담긴 아이러니함을 이해하지 못한 외국인들은 왜 ‘강남스타일’에 열광했을까. 2025년의 ‘케이팝드’에서 또다시 ‘강남스타일’의 멜로디가 흐를 때면 묻고 싶어진다. 그래서 케이팝이 뭔데요?

세기의 팝송을 케이팝 스타일로 재해석해 경연한다는 프로그램 취지를 보면, 재해석 과정을 찬찬히 뜯어보는 게 ‘케이팝드’의 정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원곡 주인은 무대에 오르기 전 ‘케이팝스럽게’ 편곡된 음원을 듣는다. 그러나 편곡의 의도를 설명해주는 장면이 없으므로 곡을 듣는 이들은 그저 ‘느낌의 공동체’로 묶여버리고 만다.

이 프로그램이 케이팝의 윤곽을 더듬어가는 중에도 한없이 케이팝스러운 지점이 있다면, 그건 참가자들이 48시간 이내에 모든 걸 해내야 한다는 점이다. 이미 ‘걸스플래닛999: 소녀대전’과 ‘프로듀스 101 재팬’ 등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각각 팀을 결성한 걸그룹 케플러, 보이그룹 제이오원에는 익숙할 속도감이다. 여기서 원곡의 주인은 케이팝 아티스트와의 합동무대를 위해 제작된 안무와 동선을 꼼꼼히 숙지해야 한다. 경연에 참여한 팝스타 메건 디 스탤리언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가볍게 놀러 온 ‘댄스파티’가 아닌 ‘훈련소’가 된다.

8부작이 진행되는 동안 변주 없이 동일한 포맷이 반복된다. 적게는 4인조 걸그룹 키스 오브 라이프부터 최대 11인조 보이그룹 제이오원이 등장할 때 관객석에서는 ‘스플릿!’(나눠져라!) 구호를 외치고 그때 무대가 양쪽으로 분리되는데, 경연을 마치고 나면 그들은 다시 한 팀으로 모여 자신들의 히트곡 무대를 선보인다.

다인원 그룹은 케이팝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정체성으로, 유닛일 때는 완전체일 때와 다른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정교한 전략이 구사된다. 그러나 ‘케이팝드’에서는 팀이 이렇게 쪼개져야 하는 이유, 즉 유닛으로서의 설득력부터 부족하다. 다시 한 팀이 된 이들은 수많은 연습을 거쳐 손발의 각도와 정렬까지 맞춘 퍼포먼스를 수행한다. 이건 분명 우리가 아는 케이팝의 맛이다.

‘케이팝드’는 ‘케이팝스러움’을 은은한 방향제처럼 분사하다 시야에서 사라진다. 케이팝 그룹과 협업한 외국 아티스트들에 의해 표현되는 케이팝의 위상과 현주소가 한없이 모호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케이팝의 뜨거운 인기를 수용했으나, 자기 안에서 처리되지 않은 감정들을 세련되게 숨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곡이 재해석되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케이팝드’는 끝까지 우리 손에 케이팝을 쥐여주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마저도 케이팝인지 모른다는 것처럼.

서해인 콘텐츠로그 발행인

*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케이팝을 듣습니다. 케이팝이 만들어낼 ‘더 나은 세계’를 제안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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