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 B의 엄마는 여름이면 냉장고에서 냉커피를 꺼내주었습니다. 한 모금 입에 물면 볼에 오른 열이 식을 만큼 시원했습니다. 보리차와 비슷하게 구수했고 살짝 달콤한 것이 어른의 맛인가 싶었어요. 글쓰기의 매력 중 하나는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앉은자리에서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박은지 시인 제공
“안녕하세요. 시 쓰는 박은지입니다.” 저를 소개할 때 자주 쓰는 말입니다. 시인은 시만 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청탁받은 에세이나 울면서 쓰는 논문, 생활비를 벌기 위해 쓰는 글도 있습니다. 글의 종류에 따라 쓰는 방식과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모두 같은 ‘글’이어서 시작은 두렵고 끝에는 묘한 홀가분함을 얻습니다.
등단하면 글을 척척 쓰게 될 줄 알았어요. 남다른 글쓰기 비결이 생길 것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등단 작가라고 해서 글쓰기가 마냥 쉽고 신나는 일만은 아니더라고요. 글쓰기 비결도 당연히 생기지 않았습니다. 글을 쓸 때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스스로 괴롭히다가 좋은 작품을 향한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빈칸을 채워나갑니다. 공감하는 독자분도 계시지요? 맞습니다. 백지 앞에서는 모두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왠지 다행입니다. 우리 모두 같은 마음이니까요.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고 글쓰기의 세계로 뚜벅뚜벅 걸어갈 용기가 필요할 때 저는 눈, 코, 입을 생각합니다. 귀와 피부도요.
2025년 여름 많이 발음된 단어를 꼽자면 ‘덥다’가 한자리를 차지할 것 같아요. ‘덥다’는 말로는 부족한 더위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더위를 부족하지 않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덥다! 지나치게 덥다! 역대급으로 덥다! 무섭게 덥다! 느낌표를 붙여봐도 성에 차지 않습니다. 이 순간 글쓰기의 유혹이 시작됩니다. 더 적절한 말 없어? 아직 부족하잖아! 더 충분히 표현해봐! 이처럼 세계를 좀더 명확하게 표현하고 싶을 때, 풍성하게 표현하고 싶을 때 글쓰기의 문이 열립니다.
그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느끼기’입니다. 눈, 코, 입, 귀, 피부가 느낀 더위는 어떠한가 살펴보는 것입니다. 벽시계에 뿌옇게 차오른 습기나 인중에 맺혀 흐르는 땀, 그 땀의 짠 기, 밤이고 낮이고 맴맴, 위잉위잉 우는 매미에 대한 걱정 같은 것 말이지요. 오감을 발동시키다보면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열심히 관찰하면 되니까요. 감각이 생각을 불러오고, 그 생각을 잘 풀어내다보면 어떤 주제에 이르게 됩니다. 특별한 주제 없이 무작정 글을 쓰고 싶을 때도 활용하기 좋은 방법입니다.
제 미각이 기억하는 여름은 열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친구 B의 엄마는 여름이면 냉장고에서 냉커피를 꺼내주었습니다. 그때는 아이스아메리카노라는 단어를 몰라서 냉커피라 불렀는데, 그것이 저의 첫 아이스아메리카노였어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유리컵에 얼음과 함께 담긴 냉커피. 한 모금 입에 물면 볼에 오른 열이 식을 만큼 시원했습니다. 아주 연하게 탄 커피여서 보리차와 비슷하게 구수했고 그러면서도 살짝 달콤한 것이 어른의 맛인가 싶었어요.
엄마가 겁주던 것처럼 커피 맛이 쓰지 않아 좋았습니다. B의 집에 놀러 갈 때마다 커피를 기대했고요. B의 엄마는 매번 귀찮지도 않은지 우리에게 옥수수와 감자, 떡 등을 챙겨주었습니다. 어른의 맛에 기뻐하며 배부르게 간식을 먹던 여름이었습니다. 어린이가 어린이로 지낼 수 있게 지켜봐준 이웃 어른이 있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흡입하며 일하는 어른으로 자라났어요.
맛에서 출발해 B의 엄마가 보여준 ‘다정’과 ‘어른의 역할’에까지 이르렀네요. B의 집에 잠시 놀러 갔다 온 것 같습니다. 글쓰기의 매력 중 하나는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앉은자리에서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감각을 잘 활용하면 더 빠르고 생생하게 글쓰기 여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 쓰는 사람도 재밌고 읽는 사람도 더 몰입할 수 있지요.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니까요.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술이 정교화할수록 감각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문화비평가이자 역사학자인 크리스틴 로젠은 그의 책 ‘경험의 멸종’에서 기술로 매개된 경험이 직접경험을 대체해가고 있음을 우려합니다. 이런 것이지요. 저는 어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 유튜브에서 베트남 푸꾸옥 여행 브이로그를 봤습니다. 리조트에서 수영도 하고, 하늘빛 바다도 구경하고, 반쎄오도 맛봤습니다. 여름휴가를 만끽했어요.
만족스러웠습니다. 순탄한 여행이었거든요. 여행 중에 겪을 수 있는 다양한 불편함이나 어려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러한 ‘매끄러움’은 실제 여행에서는 존재하지 않죠. 간접경험은 직접 겪어야 만날 수 있는 고통과 실패를 지워버립니다. 고통과 실패를 통해 이뤄지는 성장도 지워지지요. 이런 상황에서 세계가 과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크리스틴 로젠이 말한 대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다고 여겼던 경험’이 사라져가는 지금, 삶을 구체적으로 느끼는 감각적 경험은 매우 귀한 일이 되었습니다.
디지털 시대는 시각에 집중합니다. 겪기보다는 보기 때문이지요. 후각, 미각, 청각, 촉각은 점점 무뎌지고 있습니다. 퇴화하고 있다는 기분까지 듭니다. 후각, 미각, 촉각은 사진이나 영상에 기록하기도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글쓰기가 중요하고, 또 필요합니다. 감각에 집중한 글쓰기는 무뎌진 몸의 세계를 되살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실내 사무실의 파워냉방 속에서 일하는 사람은 정수리와 팔뚝에 내려앉는 찬 공기에 부르르 떨다가 얇은 셔츠를 걸치며 이게 맞나 하는 고민에 빠지기도 하겠고, 건설노동자는 발밑이 뜨겁다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이마에서 쏟아지는 땀에 눈이 따갑기도 할 것입니다. 괴물 폭우를 뚫고 배달 중인 사람은 우비 안에서 올라오는 시큼한 땀 냄새를 맡으며 오토바이 바퀴를 덮치는 빗물을 느끼겠지요. 수해 복구에 한창인 사람들, 농사짓는 사람들, 유치원 방학을 맞은 어린이는 올여름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요.
‘덥다’는 말로는 부족한 더위입니다. 기록적인 폭염으로 이 더위를 모두 직접 경험할 수밖에 없어요. 모두 같은 더위 속에 있는 듯하지만,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더위의 모양은 조금씩 다릅니다. 다시 말해보겠습니다.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더위의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같은 더위 속에 있습니다. 직접 경험하고 느끼며 다른 사람의 감각을 이해할 순간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려면 나의 감각부터 꺼내봐야겠지요. 바로 지금 글쓰기를 시작할 때입니다.
박은지 시인·‘여름 상설 공연’ 저자
*박은지 시인이 나를 움직이고 남을 움직이고 세상을 움직이는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4주마다 연재.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써볼까요? 여러분의 여름은 어땠나요? 오감을 활용해 여름을 표현해봅시다. 하나의 감각에서 출발해도 좋고, 두세 개의 감각을 섞어도 좋습니다. 1천 자를 모두 감각적 표현으로 쓰는 건 쉽지 않아요. 오감으로 글을 시작한 뒤에는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롭게 써보세요. 특별한 주제에 도달하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일단 쓰는 게 중요합니다.
주제: 여름
분량: 1천 자 정도
마감: 2025년 9월7일
보낼 곳: ha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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