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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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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과 멧비둘기 어두워지는 계절…처음 보는 것처럼 본다면

마음으로 관찰하고 언어로 그리는 방법…독자글은 11월30일까지 ‘나의 단골집’을 주제로
등록 2025-11-13 21:20 수정 2025-11-20 09:26
낙엽이 움직이기에 살펴보니 멧비둘기였습니다. 보다보니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 되었다면 관찰에서 묘사로 나아갈 때입니다. 2025년 11월 경희대 서울캠퍼스에서. 박은지 시인 제공

낙엽이 움직이기에 살펴보니 멧비둘기였습니다. 보다보니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 되었다면 관찰에서 묘사로 나아갈 때입니다. 2025년 11월 경희대 서울캠퍼스에서. 박은지 시인 제공


가을이 한껏 몸을 펼치고 있습니다. 겨울이 성급하게 밀고 들어오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한 걸음 물러선 모양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조금 더 오래 가을을 느낄 수 있겠지요.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일상에 묻혀 있다가 고개를 들면 초록의 가장자리에 노랑이 번지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볕이 오래 머무는 자리엔 금빛이 춤을 추고요. 인주색과 다홍빛이 섞인 잎 아래로는 아직 초록이 남아 계절을 붙잡고 있습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이 스르르 움직이기에 자세히 들여다보니 멧비둘기입니다. 낙엽과 멧비둘기는 비슷한 농도로 어두워집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가을 단풍을 근사하게 즐기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저도 평소에는 그저 ‘와, 단풍 예쁘다’ 하고 말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단풍 예쁘다’는 말은 어딘가 막연합니다. 감각이 밀어 올린 표현이라기보다는 계절에 따라 자동으로 꺼내는 상투적인 인사말처럼 들릴 때가 있지요. 일상 대화라면 그 한마디로 충분하지만 글을 쓸 때는 다릅니다. 단풍의 어디가 어떻게 예쁜지, 내가 느낀 ‘예쁨’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막연한 감탄 대신 구체적인 감각을 붙잡으려고 시도해봐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관찰이 필수입니다. 역시 글 쓰는 사람은 관찰자의 운명을 타고난 모양입니다.

천천히 깊게 들여다 보면

관찰은 육체의 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요. 마음의 눈, 영혼의 눈까지 동원해야 한다고요. 하지만 우리는 먼저 육체의 눈을 힘껏 활용해봅시다. 마음을 끄는 대상이 있다면, 글로 담고 싶은 장면이 있다면 그저 가만히 바라보세요. 그리고 그 대상을 인식했다면 이제 몰입할 차례입니다. 몰입이 어렵다면 그 대상을 ‘마지막으로 본다’는 마음으로, 혹은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세요. 그동안 보지 못한 것이 새삼 보일 것입니다. 아무 변화가 느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달라져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천천히, 깊게 들여다보면 세계는 점점 더 많은 이름을 갖게 됩니다.

관찰이 끝나면 언어의 차례가 옵니다. 묘사는 관찰이 머물던 자리를 말로 옮기는 일입니다. 묘사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저는 묘사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그림 그리듯이’라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오곤 합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묘사는 그림 그리듯이 쓰는 것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기 때문일 거예요. 아니 그런데 그렇다면 그림은 어떻게 그리는 걸까요?

요즘도 사생 대회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 봄이나 가을이면 어린이대공원으로 사생 대회를 나가곤 했습니다. 후다닥 그림을 그리고 친구들과 놀 생각에 들떠 있었지요.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림을 그리다, 완성된 작품을 두고 서로 놀리기도 했습니다. 재미있게도 같은 풍경을 두고 그린 그림들이 하나같이 달랐습니다. 어떤 친구는 나무를 크게 그렸고, 어떤 친구는 하늘을 넓게 펼쳐 그렸습니다. 누군가는 멀리 있는 놀이기구를, 누군가는 청설모를 포착해 그리기도 했지요. 같은 자리에서 같은 풍경을 봤지만, 완성된 그림은 저마다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차이는 관찰에서 옵니다. 사람마다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다르고, 마음에 머무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묘사는 삶을 감각적으로 회복시키는 일

묘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대상이나 장면을 보았다면 분명히 마음을 두드리는 지배적인 인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인상이 왜 강렬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묘사의 출발점입니다. 나는 왜 이 장면에 집중하는가? 이 풍경이 내 삶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 앞으로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남길까? 같은 질문을 따라가다보면, 색과 형태의 기록을 넘어 삶의 일부가 글 속에 스며듭니다. 그렇게 쓰인 묘사는 대상을 말하면서 동시에 나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묘사는 글을 풍성하게, 살아 있게 하는 기술을 넘어 삶을 감각적으로 회복시키는 일로 나아갑니다.

또한 묘사는 생각이나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고 보여줌으로써 글의 밀도를 높이고, 쓰는 즐거움과 읽는 즐거움을 동시에 더합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라고 쓸 수도 있지만 묘사를 통해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아파트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반짝 등이 켜졌다 꺼지면 비상계단 창문 밖으로 은하수가 흘러내렸다. 수많은 아파트와 빌딩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꼭 그리 보였다. 담배꽁초와 먼지 쌓인 자전거, 정체를 알 수 없는 얼룩은 어둠 속에 묻혔다. 둘은 손을 꼭 잡고 윤곽만 남은 서로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창문 밖 은하수로 시선을 옮겼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비상계단에서 가느다란 사랑을 이어가는 연인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묘사의 기쁨입니다. 감정을 말로 설명하지 않고, 장면을 통해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이지요.

묘사를 하다보면 생각과 감정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글에 담깁니다. 그래서 묘사는 장면을 꾸미는 글쓰기 기술에 그치지 않고 글쓴이의 내면을 드러내는 섬세한 방식이 됩니다. 꾸준히 묘사를 연습하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문장 연습하기에도 좋지요.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데도 묘사는 유용합니다. 착하다, 욕심이 많다, 순하다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복잡한 면모를 인물의 행동, 표정, 말투를 묘사하며 보여줄 수 있지요. 이런 방식은 소설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손보미 소설가의 ‘세이프 시티’(창비 펴냄)는 인간의 기억을 삭제,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 가까운 미래를 그리는데요. 이 기술을 개발한 인물인 임윤성을 보여주는 장면이 흥미롭습니다. “그때마다 임윤성은 슈트 차림이었다. 식당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넥타이를 풀어서 재킷 주머니에 구겨서 집어넣었고, 재킷은 벗어서 아무렇게나 의자에 걸쳐두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구겨진) 넥타이를 꺼내 다시 맨 뒤 (역시 구깃구깃해진) 재킷을 입고는 했다.” 인간과 기억의 고유함을 환상이라 주장하는 기술주의자 임윤성의 통제와 무질서가 공존하는 내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묘사는 설명보다 더 정확하게 인간을 보여줍니다.

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묘사는 결국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언어입니다. 같은 장면을 보더라도 어떻게 관찰하고, 무엇을 포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문장이 탄생합니다. 그러니 묘사는 세상을 다시 배우는 과정이자,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느리고 세심하게 바라본 세계는 언제나 새로운 얼굴을 보여줍니다. 묘사를 연습한다는 것은 곧 ‘보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그리고 보는 법을 배운 사람은 쉽게 무뎌지지 않습니다.

 

박은지 시인·‘여름 상설 공연’ 저자

 

독자 글

‘내가 사랑하는 것’을 주제로 네 분의 글이 도착했습니다. 노다니엘님의 글에서는 흙이 품고 있던 삶의 온기와 인간다움이, 숙연님의 글에서는 바이올린에 대한 깊은 애정과 교감이 느껴졌습니다. 음악이 주는 위로와 기쁨이 전해졌습니다. 정선님의 글은 음악과 뜨개질이 어우러지는 순간의 몰입을 통해 일상의 피로를 씻고 평화를 찾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요. 소민님은 겨울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시간과 존재, 삶과 죽음의 경계를 사유하는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작은 잔소리를 덧붙이자면 제목은 글의 얼굴입니다. 글보다 먼저 독자를 맞이하니, 조금 더 빛나야 합니다. 멋진 제목을 붙여주신 소민님의 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겨울의 밤을 사랑합니다(김소민)

당신은 한겨울의 대낮을 좋아한다고 했죠. 난 그 계절의 기나긴 밤을 좋아합니다. 차가운 바람과 성큼 길어진 어둠과 그 긴 밤하늘 위로 떠오르는 오리온자리를.

천구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별은 여름철이 더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별을 관측하기 쉬운 계절은 겨울이지요. 그 구름 없이 새카만 겨울의 우주 속에서, 도시의 광공해에도 불구하고 수백 광년 너머에서부터 온 빛을 찬란하게 반짝거리는 천체가, 그 별들이, 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늘 하늘 위에서 나를 위로해주던 날들이 있었기에, 나는 겨울의 밤을 사랑합니다.

그 별들을 볼 때면, 아니, 비단 그 별들이 아니어도. 별을 볼 때면 늘 그런 생각이 들어. 저 거리에서는, 수백 광년 너머에서는, 그곳에서 지구를 볼 수 있다면, 그들이 보는 지구는 수백 년 전의 모습일 겁니다. 수십 광년 너머에서 보는 지구는 수십 년 전의 모습일 테고. 그렇다면 우리가 알았던, 알고 있었던, 혹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태곳적부터 존재해온 모든 이들이. 그곳에서는 아직 살아 있는 겁니다. 아직 웃고, 달리고, 안고, 노래하고, 사랑하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시간이란 얼마나 기묘하고 이다지도 신기할까요. 수십 광년의 거리에서, 수백 광년의 거리에서 과거를 볼 수 있다면, 만약 우리가 그 반대로도 갈 수 있다면, 미래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는 걸까요. 우리는 이 3차원 속에 갇혀 벗어날 수 없지만 우리 위의 4차원에서는 시간도 점과 선과 면처럼 시작과 끝이 보이는 그런 것으로 존재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그 차원 위에서 무엇을 볼까요.

수백 광년 너머에서 봤을 때, 우리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 이렇게 살아 있어요. 숨을 쉬고 있는데, 동시에 어딘가에서는 죽어 있을 것이고. 그런 걸 생각하면. 우리가 존재였다 비존재였다 다시 존재가 된다는 걸 생각하면. 그런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 모든 중첩과 삶과 죽음과 숨과 연기와 무와 유를 생각하면.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정말 신기하지 않나요. 이 모든 것들이.

 

여러분의 글을 보내주세요!

묘사를 해봅시다. 대상이나 장면을 두고 강렬하게 받은 인상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고 보이는 대로 글을 써보세요. 쓰고 난 뒤 어떤 감정이 스며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좋습니다. 문장에 공들이기도 잊지 마시고요.

 

주제: 나의 단골집

분량: 1천 자 정도

마감: 2025년 11월30일

보낼 곳: ha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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