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명이 베이징 유학 중에 발간한 사회주의 잡지 ‘혁명’ 제8호(1925년 8월1일) 1면. 임경석 제공
양명(梁明)이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처음 가담한 것은 중국 베이징 유학 시절이었다. 베이징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1924년 말, 기관지 ‘혁명’을 발간하는 사회주의 단체 결성에 참가했다. 이 단체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다. ‘창일당’(創一黨)이라는 기록도 있고, ‘혁명동지회’ 혹은 ‘혁명사’라고도 하고, ‘북경고려공산당’이라고도 한다. 어느 명칭이나 다 일리가 있었다. 창일당이란 명칭은 사회주의 여러 단체를 통일한다는 지향점을 가졌기 때문에 사용된 것이었다. 혁명동지회나 혁명사라는 말은 ‘혁명’이라는 기관지를 내는 단체라는 의미로 사용됐고, 북경고려공산당이란 베이징에 있는 조선인들의 사회주의 단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렸다.
당원 수는 적었다. 당원이었던 김성숙의 증언에 따르면, 20명쯤 됐다.1 이 증언은 실제에 부합한다. 설립된 지 1년쯤 지난 뒤에 작성된 내부 기록에 따르면, 처음에는 구성원이 7명이었는데 1년 뒤에는 22명으로 늘었다고 한다.2 그중에서 이름이 밝혀진 사람은 10명인데, 대다수가 베이징 소재 여러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었다. 베이징대, 평민대, 민국대, 협화의학원 등지에 다니는 유학생들이었다. 나이도 젊었다. 한 사람의 예외를 빼면 모두 20~32살에 달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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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당시 베이징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700명 안팎이었고, 그중에서 유학생은 140명가량 됐다. 그로 미뤄보면 양명이 가담한 사회주의 단체 구성원은 베이징 유학생들 가운데 사회주의를 수용한 사람들로 이뤄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명은 이때 23살이었는데, 단체 안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는 증언이 있다. 또 다른 당원 장건상의 회고에 따르면, 양명은 당내에서 ‘가장 유력한 학생’이었다. 문필 능력이 뛰어났음을 감안하면, 기관지 ‘혁명’ 발간 과정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고문의 필자들은 적성(赤星), 다각(多脚), 독각(獨脚), 연우(然愚), 천방(天放) 등과 같은 가명으로 표시돼 있는데, 그중 몇은 양명의 가명이었을 것이다.
‘혁명’은 한 달에 한 번씩 발간하는 얇은 두께의 한글 잡지였다. 비용은 유학생들이 자신의 학비를 절약하여 모은 것을 갖고서 충당했다. 그 돈으로 종이도 사고 인쇄비도 댔다. 창간호는 32쪽 분량으로 200부를 찍었는데, 머지않아 1천 명의 고정 독자를 거느리게 됐다. 잡지 분량이 줄곧 동일했던 것은 아니다. ‘혁명’ 제8호의 실물이 남아 있는데, 그 분량은 8쪽이었다.4 창간호 이후로는 아마 계속 8쪽에 머물렀던 것 같다.
인쇄 방법은 석판인쇄였다. 활판인쇄로 찍어내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한글 활자를 구비하는 데 많은 돈이 들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석판인쇄는 물과 기름이 반발하는 성질을 응용한 것으로서, 석회석 평판에 기름기를 지닌 지방성 필기구로 전 지면을 제작하는 공정을 포함하고 있었다. 당원 김성숙이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그 공정을 전담했다. 과도한 작업 때문에 한때 실명 위기에까지 몰려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양명은 유학생들의 공개적인 대중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보기를 들면, 1924년 1월 조선유학생회 강론부에서 개최한 ‘가까운 장래에 국산을 장려하여 일용 외국 상품을 배척할 수 있을까?’ 토론회에 연사로 참여했다. 그는 ‘그렇다’ 편에 서서 토론했다.5 유학생회는 비밀단체 북경고려공산당이 합법적인 대중운동을 전개하는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학생들의 공부 모임 ‘사회과학연구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회원은 약 30명인데, 2주에 한 번씩 모여서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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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유학생 시절은 양명에게는 혁명운동의 훈련 시기였다. 비밀단체와 공개단체를 오가며 합법⋅비합법 활동을 배합하는 방법을 익혔다. 또 언론 매체를 통해 여론을 제기하고 이끌어가는 방법도 이 시절에 배웠다.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 방법을 논한 ‘나는 이와 같이 본다’(如是我觀) 기고문 첫 쪽.(‘개벽’ 제65호, 1926년 1월) 국사편찬위원회
양명이 두 번째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참여한 것은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였다. 1926년 3월5일 서울 한복판에서였다. 종로5가에 있는 중국음식점 길순관(吉順館)에 10명의 사회주의자가 모였다. 이날은 조선의 사회운동을 좌우하는 공개 사상단체 ‘4단체합동위원회’와 ‘전진회’ 임원들의 연합 간담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일본 경찰의 감시망은 그에 집중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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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비밀결사 ‘레닌주의단’을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왜 이 단체를 만들었나? 당시 사회주의 운동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비밀결사 조선공산당과 당외에 위치한 공산단체 고려공산동맹이 대중운동을 양분한 채 경쟁하고 있었다. 조선민중운동자대회라는 전국 규모 대회를 개최하네 마네,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라는 최고 기관을 설립하네 마네를 둘러싸고 다투고 있었다.
‘레닌주의단’의 목적은 분열된 조선 사회주의 운동을 통일하는 데 있었다. 당시 용어로 표현하자면 ‘운동선’을 통일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을 가리켜 “통일을 열망하는 열성분자만의 회합”으로 간주했다. 그를 위해 독자의 중앙간부를 선출하고 자체의 조직망을 확장하기로 결정했다.6
운동선을 통일하기 위해 이들이 택한 방법이 독특했다. 그 방법론은 양명이 잡지 ‘개벽’에 발표한, ‘나는 이와 같이 본다’(如是我觀)라는 장문의 기고문에 잘 표현돼 있다.7 그에 따르면, 기존의 양대 세력을 타협하게 하여 양자를 통합하는 방법은 불가능했다. 또 제3당을 세워서 기존 세력을 복속하려 하는 것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분규를 더욱 복잡하게 할 위험이 있었다. 양명이 염두에 둔 방법은 통일을 열망하는 열성분자들이 기존 단체들 속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 반대파를 조직하고 그 단체의 집행부를 장악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복안이었다.
요컨대 제3의 사회주의 비밀결사를 만들되 기존 조직의 밖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활동한다는 방법이었다. 당시 용어를 빌리자면 당 속에 당을 만드는 행위였다. ‘당중당’을 조직하는 것은 사회주의 당 조직론의 기준으로 보자면 당의 규율을 해치는 부도덕한 행위였다. 당 규약 위반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명은 그 길로 나아갔다. 그만큼 운동선의 통일이 절실하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단체는 영문 표기 ‘Leninist League’의 이니셜을 따 ‘엘단’ ‘엘엘파’라고 불렸다. 이 명칭은 사람들 입에 은밀히 옮겨가는 과정에서 ‘엠엘파’라고 오전되기도 했다. 이리하여 사회주의 역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새로운 공산주의 그룹이 탄생했다.
양명이 몸담은 세 번째 사회주의 비밀결사는 고려공산청년회와 그 상급기관인 조선공산당이었다. 그는 레닌주의단이 갖고 있던 행동 계획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먼저 고려공산청년회에 입회했다. 이미 입회해 있던 레닌주의단 동료들의 협력 덕분에 매사가 순조로웠다. 집행부에도 쉽사리 진입했다.
양명은 1926년 9월 초 합청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됐고,8 다음달인 10월 중순에는 책임비서 직위에 올랐다.9 합청이란 고려공산청년회와 고려공산청년동맹(서울파), 두 공청 기관의 집행부가 공동으로 구성한 합동 중앙집행위원회를 가리킨다. 합청이 가능했던 이유는 6·10 만세운동의 후폭풍으로 불어닥친 대대적인 검거의 회오리바람 때문이었다. 당⋅공청 간부들이 경찰에 대거 체포됐고, 그로 인해 간부진에 큰 공백이 생겼다. 레닌주의단 멤버들은 두 공청 기관의 집행부에 진입할 수 있었고, 그해 8월8일 합청을 발족시켰다. 운동선 통일운동의 노정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 사건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비밀결사 공산당과 고려공산동맹을 통합하는 과제였다.
양명이 당 중앙간부로 취임한 시기에 공산당의 통합도 큰 진전을 보았다. 고려공산동맹의 구성원 140명이 대거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던 것이다. 1926년 11월16일에 있었던 일이다. 운동선 통일의 물꼬가 트였다. 양명은 이 과정에도 힘을 썼다. 그는 1926년 11월 중순부터 당 중앙집행위원에 보임됐다. 공청 책임비서로서 겸직하는 자리였다.10

비밀결사 레닌주의단 결성일에 경찰의 감시 눈길을 빼돌리는 역할을 했던 사단체합동위원회⋅전진회 연합 간담회 기사. 조선일보 1926년 3월7일 석간 2면
레닌주의단은 그해 12월6일 서울에서 비밀리에 열린 조선공산당 제2회 대회에서 자신의 소임을 완성했다. 신임 중앙집행위원 7명 가운데 4명을, 후보 위원 7명 가운데 5명을 레닌주의단 구성원으로 채워넣었다. 마침내 당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뿐인가. 당외에 잔류해 있던 고려공산동맹의 남은 인사들, 서울파 구파라고 지칭되던 사회주의자들도 자기 조직을 해소하고 1927년 3월 입당하는 데에 동의했다. 명실상부하게 운동선이 통일된 것이다.
운동선 통일이 양명 개인의 업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대오의 통합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가 공청과 당의 중앙간부로서 줄곧 재임해 있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의 숨은 노력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양명의 중앙간부 지위는 오래 계속됐다. 그는 1928년 2월 열린 제3회 당대회에서도 중앙집행위원 후보로 선임됐고, 그해 9월에는 중앙집행위원으로 승진했다. 이듬해 3월 공산당 업무차 중국 상하이로 파견될 때에도 여전했다. 기관지 출판과 국제당 연락을 담당하는 국외 거점 책임자로서 당 중앙간부의 자격을 잃지 않았다. 놀랍다. 양명의 당 중앙간부 재임 기간이 그토록 오래 지속된 사실이 말이다. 비밀결사 탄압사건이 계속된 탓에 당 중앙간부의 면면이 빈번히 교체되던 당대 현실에 비춰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일본 경찰에 한 번도 체포된 적이 없었다. 어느 정도는 행운이 깃들었기 때문이지만, 그의 비밀 활동 능력이 우수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겠다.
<사진>
1. 양명이 베이징 유학 중에 발간한 사회주의 잡지 ‘혁명’ 제8호(1925년 8월1일) 1면. (C)임경석
2.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 방법을 논한 ‘나는 이와 같이 본다’(如是我觀) 기고문 첫 쪽.(‘개벽’ 65호, 1926년 1월) (C)국사편찬위원회
3. 비밀결사 레닌주의단 결성일에 경찰의 감시 눈길을 빼돌리는 역할을 했던 사단체합동위원회⋅전진회 연합 간담회 기사. (C)조선일보 1926년 3월7일, 석간 2면.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1. 이정식,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2005(개정판), 79~80쪽.
2. Доклад корейской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й организации в Пекине(북경고려공산당 보고), 1925년 12월14일,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10 лл.130-131.
3. 조규태, 1920년대 재북경 한인 혁명사의 ‘혁명’ 발간과 혁명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6, 2020년, 257~258쪽.
4. ‘혁명’ 제8호, 1925년 8월1일. 1~8면,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219.
5. ‘북경에 있는 조선유학생회’, 동아일보 1924년 1월26일. 2면.
6. ‘서울계공산당검거개황’, 1930년(방인후), ‘북한 조선노동당의 형성과 발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0년(재판), 36~37쪽 재인용.
7. 梁明, 如是我觀, ‘개벽’ 제65호, 1926년 1월1일, 4~15쪽.
8. ‘高麗共産靑年會中央總局會錄’, 1926년 9월5일, 3쪽, РГАСПИ ф.533 оп.10 д.1894 л.111-115.
9. Портокол заседа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комитета Кор.КСМ от 16 октября 1926 г. в г.Сеуле Корея(고려공청 중앙위원회 회록), с.2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161-2
10. Доклад о съезде: Протокол 2-го съезда Корейской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й Партии(대회에 관한 보고, 조선공산당 제2회 대회 회록), с.10, РГАСПИ ф.495 оп.45 д.19 л.121-130о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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