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해남 달마산 달마고도 동편, 완도가 해를 밀어 올리고 있다. 사진 신동호
서울의 밤에는 눈 대신 시민들이 거리에 내린다. 함박눈처럼 수북이, 추악한 음모를 점령한다. 오늘 아침 엄마들은 카레를 한솥 끓이고, 전화를 걸어 아들 걱정을 수다로 풀고, 모자를 챙겨 거리로 나온다. 하학길의 고등학생이 묻는다. “엄마는 어디야?” 이태원에서 친구를 잃은 여대생은 구슬 응원봉을 흔든다. 진짜 화나면 분노를 해학으로, 예술로 쏟아내는 법이다. 깜깜한 밤이 여의도 밖으로 밀려난다.
서울의 밤은 민주주의를 응원한다. 시민들은 촛불로 지은 옷을 입었다. 밝고 따뜻하다. 서울의 밤은 계엄군의 수뇌부와 일반 병사를 구분해낸다. 계엄군이라 부르지 않고, 하사 김아무개, 중사 이아무개라고, 이름을 불러준다. 아버지가 아들이자 소대장인 박아무개에게 전화한다.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마라.” 서울의 밤에는 멀쩡한 시민과 시민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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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밤은 흥얼거린다. 서울의 밤은 서성인다. 서울의 밤은 그것을 폭설이라 부른다. 시민들의 눈은 아름답다. 시민들의 눈은 동료애를 전할 수 있고, 구호도 외칠 수 있다. 아름다운 눈이 어묵 국물을 마시고, 편의점에 들러 마스크를 사고, 지하철을 탄다. 우리는 눈길을 어지럽히지 않을 거야. 발자국을 곱게 찍으면 그 발자국에 또 누군가 발자국을 포개며 따라오겠지.

윤석열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과 민주노총 조합원 등이 지난 4일 저녁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서 ‘윤석열 즉각 체포 촉구 긴급행동’ 집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영국 글래스고의 밤에는 한때 잿빛 눈이 내렸다. 2021년 11월1일,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를 위해 한국의 대통령이 글래스고에 갔다. “산업혁명의 도시 글래스고가 탄소중립을 선도하는 도시로 탈바꿈했다”고 말했다. 뼈대가 굵은 노동자의 손은 분리수거장 앞에서 박스 테이프를 일일이 뜯어낸다. 지구와 공존하는 삶을 평범한 시민이 평범한 삶으로 바꿔낸다. 기후위기의 당사자는 미래세대다. 시민만이 미래를 위해 현재의 불편함을 감수한다.
글래스고의 밤은 한국을 주목한다. 한국의 시민들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더 빨리 일어난다’. 광주, 시민군의 주먹밥은 할머니들의 낡은 치마에 담겨 온다. 젊은 여자는 흰 양말을 가득 가져와 죽은 자들의 맨발에 하나씩 신겨준다. 팬데믹, 진도의 봄동이 대구의 코로나 병실에 배달된다. 노조는 월급을 덜어내고 일자리를 지켜준다. 100여 개국 정상들은 촛불로 민주주의를 일으키고, 연대로 코로나를 이겨낸 사연을 듣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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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든버러의 새벽을 달렸다. 숙소가 부족한 글래스고의 밤이 이웃 도시 에든버러 방문의 행운을 줬다. 이슬을 머금은 공기가 마음을 가라앉힌다. 거리와 골목이 사색에 잠겨 있다. 새벽이 시민들을 짓누르지 않고, 명령하지 않는다. 양심으로 단단하게 꿰맨 군화는 전쟁터에서만 신는다. 스코틀랜드가 영국의 연방이 되는 순간에도 자신들이 만든 법을 유지한다. 영국의 법은 에든버러의 관습에 무지하다. 도시의 전통은 시민의 자부심으로 만들어지고, 민주주의는 시민의 자존감을 먹고 자란다.

영국 에든버러의 골목길. 고즈넉하다. 사진 신동호
서울의 밤은 숨 쉰다. 시민의 입김이 하늘로 올라간다. 은행나무들의 노랗고 작은 잎이 하늘을 쓰다듬는다. 달빛이 비치지 않는 곳으로 내란 수괴들은 숨죽이고, 부끄러운 몸을 숨긴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한다. “독재는 습관이다. 그것은 마침내 질병으로 변한다.” 병든 자들은 변명거리, 도망치는 방법, 힘으로 속박하는 기술만을 역사에서 들춰낸다. 이 순간만 지나가면 될 거라 믿는다. 시민들은 고단하다. 치료될 것이라 믿는 시민들이 있는 동안, 더 늦기 전에 병든 자들은 병이 깊었다고 고백해야 한다. 함성이 무겁다. 함성 속에 정의가, 사형과 무기징역 선고가 여러 개 들어 있다.
나는 전남 해남 달마산 둘레길 17㎞, 달마고도의 눈길을 달렸다. 시계 방향으로 돌면 완도가 밀어 올리는 일출을 보고, 다시 몇 개 고개를 돌아 서편으로 가면 슬픔을 붉게 감싸고 있는 진도를 본다. “그날로부터 잘못된 명령에는 누구도 무조건 복종하지 않아.” 세월호가 잠긴 맹골수도의 거친 바다, 포말들이 하얗게 귀띔해준다. 시민들은 이제 슬픔의 징후를 안다. 슬픔이 오기 전에 그 원인을 쫓아내는 방법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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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 달마산 둘레길, 눈 내린 달마고도를 달렸다. 사진 신동호
겨울 달마산, 미황사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인도에서 오신 달마선사 머리에 눈이, 남도의 아픈 기억만큼 맵싸하게 내려앉는다. 법당 가는 길, 가지런히 박힌 주지 스님의 발자국 위에 삶을 위로하는 염불 소리 그윽하다. 황지우 시인이 미황사를 노래했다. “달마산, 옴팍한 기슭에 미황사가 숨어 있는데/ 그 주춧돌에 거북이, 게가 돋을새김으로 붙어 있다./ 이 작은 것들이, 바다 우에 떠 있는 사원을/ 예까지 밀고 오다니….” (황지우 ‘해인’) 시인께서는 알고 있다, 작은 것들이 저지른 위대한 일들을, 작은 것들만이 슬픔을 안다는 것을.

전남 해남 달마산 미황사에 눈이 내렸다. 멀리 진도가 보인다. 사진 신동호
눈길에 남은 내 발자국을 본다. 오른쪽 발만 바깥쪽으로 열려 있다. 오른쪽 종아리의 잦은 부상이 남긴 후유증이리라. 오른쪽 고관절도 자주 뻐근하다. 오래, 건강하게 달리려면 제대로 된 처방이 있어야 한다. 내란의 수괴들, 그 주변에서 악행을 일삼는 이들은 “권력을 잃는다”고 투덜댄다. 너희들의 것이 아니었는데 잃는다고 엄살이라니, 자기들끼리의 헛소리다. 권력은 저녁의 산기슭으로 아련히 사라지는 범종 소리일 뿐이다. 진정한 권력은 새벽 첫차에 몸을 실은 고단한 일상에 있다. 다시는 시민들의 일상에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서울의 밤은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다. 좋은 일을 하면서 얼굴을 붉힐 이유가 없다. “제자리를 찾는 게 아니에요. 또 앞으로 가는 거죠.” 서울의 밤에 첫 번째 눈이 내렸다. 소년은 추위에 움츠렸다. 두 번째 눈이 내리고 나서야 ‘소년이 온다’. 불행을 아름답게 빚어 비로소 우리 곁에 늘 둘 수 있게 해준다. 아버지들이 “미안하다” 한다.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세 번째 눈이 내리면 그때 어떤 삶도 존엄을 갖추게 될 것이다. 모든 나라, 모든 시민이 독재와 계엄을 이겨내는 방법을 알게 된다. 서울의 밤은 불이 꺼지지 않는다. 조그만 이야기가 조그맣게, 그러나 촛불의 숫자만큼 쓰이고 있다.

영국 에든버러대학. 애덤 스미스와 찰스 다윈의 모교다. 사진 신동호
에든버러의 밤은 잠이 편안하다. 잠이 깊을수록 꿈이 찾아오기 쉽다. 애덤 스미스와 찰스 다윈이 에든버러대학에서 많은 꿈과 만났다. 그 교정을 달린다. 내 운동화 끝에 스친 낙엽은 양자역학을 탄생시킨 막스 보른이 밟았던 낙엽이다. 이 대학에서 이산화탄소, 질소가 발견됐다. 냉장고, 보온병을 만들고 B형간염 백신, 마취제로 인간 수명을 늘려주었다. 탐정 셜록 홈스의 고향도 이곳이다. 코난 도일은 교수님들의 행동을 메모해두었다가 그에게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로 인해 한국의 소년은 추리로 밤을 지새웠다. 300년 가까운 세월, 에든버러대학은 정치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싸웠다. 독립적인 교육기관, 자율이 이뤄낸 찬란한 성과물이다.

영국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궁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여름마다 머물렀다. 사진 신동호
에든버러성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해리 포터’의 호그와트를 연상하게 한다. 홀리루드 궁전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여름마다 머물던 곳이다. 홀리루드 공원의 거대한 언덕 곁을 달리는데 언덕이 계속 같이 달리는 기분이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푸른 구릉과 수월하게 일치시켜본다. 조앤 롤링이 소설을 쓴 카페 ‘엘리펀트 하우스’가 문을 열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쉬웠다. 그저 이 도시가 ‘해리 포터’를 탄생시킬 만한 자격이 충분하고, 여전히 밤마다 꿈이 찾아온다는 것이 부러웠다.

영국 에든버러성. 해리 포터 호그와트를 연상하게 한다. 사진 신동호
서울의 밤은 매일 자긍심이라는 선명한 나이테를 새긴다. 시민들의 행동이 더는 의심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아스팔트에, 보도블록에 남겨놓는다. 오늘, 서울의 밤이 “부러워할 거 없어”라 속삭인다. 한바탕 눈이 내리고 나면, 서울의 밤도 잠이 편안해질 것이다. 명령어만을 주고받던 이들은 절치부심, 감옥 벽에 ‘권력’이나 새기며 어리석음을 반복할 것이다. 병사의 명예는 회복되고, 그사이 꿈이 갖가지 모습으로 젊은이들에게 찾아올 것이다. 서울의 밤이 아로새긴 것들은 검열할 수 없는 재기발랄, 민주주의가 주는 자유로운 상상력이다. ‘발견했다, 발명했다, 창작했다’라는 동사로 젊은이들에 의해 빛나게 태어날 것이다.
서울의 밤에 눈이 쌓인다. 눈은 어울려 내리고 뭉쳐 쌓이지만, 그 작은 결정은 같은 모습이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각각 아름답다. 시민들은 자기 이름을 걸고 실력에 맞게, 컨디션에 맞게, 혼자 혹은 동료들과 달린다. 결승점은 없다. 더 큰 민주주의로 항상 민주주의의 위기를 이겨나간다. 서울의 밤은 시민들의 밤이다. 나도 거기에서 눈발 하나가 되어본다. 선한 발자국을 찾아 수줍게 발자국을 포개본다.
글·사진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58번의 순방으로 40개 나라를 방문했다. 신동호 시인은 연설비서관으로 참모 가운데 유일하게 모든 순방 일정을 보좌했고, 새벽 시간을 활용해 낯선 나라를 달렸다. 그때 보고 느낀 감정은 문 전 대통령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떠나며’ 시리즈에 고스란히 담기기도 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시인의 달리기에 대한 생각과 함께 묵혀놓았던 순방지의 새벽 이야기들을 4주마다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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