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스트리아 빈의 새벽 도나우강. 사진 신동호
오스트리아 순방을 준비하는 동안 한 사람이 가슴에 묵직하게 자리잡는다. 몽양 여운형 선생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오스트리아는 분단의 숙명을 좌우를 뛰어넘는 연립정부 구성으로 돌파한다. 해방 후, 몽양만 고고히 좌우합작으로 38선을 지워내려 했다. 1947년 7월19일, 동대문운동장으로 가던 몽양의 자동차가 혜화동 로터리에서 트럭과 추돌한다. 이윽고 총성. 몽양의 곁에 좌우합작 문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몽양의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쓰였을 문서를, 기다리던 미군정은 끝내 받지 못한다. 몽양과 함께 좌우합작의 대업도 암살당했다. 좌우가 손을 한 번만이라도 잡아보았더라면, 못내 아쉽다. 우리에게 합작의 서사가 빈곤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환한 거리가 내내 눈부시게 느껴졌다.
새벽에 깨어 도나우강까지 달린다. 잔물결이 보고 싶다. 강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왔는지 알고 싶다. 강은 겸손해 보인다. 이방인을 알아보지 못한다. 묻어 흘러가라는 것일까. 아무렴 이 정도는 모두 품어 흐름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일까. 도나우강의 왈츠가 그렇게 탄생했을 것 같다. 1866년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 비스마르크와의 전쟁에서 패한다. 유럽을 더 이상 호령할 수 없게 된다. 국민들도 우울하다. 이때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오스트리아를 위로한다. 서로 마주 보고 빙글빙글, 왈츠에 맞춰 원을 그리다보면 아! 그렇다, 혼자 출 수 없는 춤이었구나. 패배를 원심력으로 밀어내기 위해서는 경쾌하게 누군가의 손을 잡고 춤추어야 한다.

오스트리아 빈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동상. 사진 신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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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대표로 선발됐을 때, 마침 조선체육회를 설립한 몽양이 기금을 모아 훈련을 지원한다. 베를린에서 손기정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손기정이 베를린에서 금메달을 딴 다음날인 1936년 8월10일, 몽양은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에서 호외를 낸다. 전면은 일장기를 지운 손기정의 사진이 장식한다. 뒷면에서는 심훈의 시가 심장을 두드린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신문의 폐간은 몽양이 기꺼이 받아들인, 자랑스러운 과정의 끝일 뿐이었다.
해방되던 해 11월 조선체육회를 재건한 몽양은 서둔다. 독립을 국제적으로 공인받기 위해 올림픽에 참가해야 한다. 1947년 4월, 육상·축구·농구·레슬링 네 종목의 국제경기연맹 가입을 마친다. 그해 6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마침내 대한민국의 가입을 승인했고, 그날 몽양은 올림픽 참가기념 경기대회에 가던 길이었다. 축제의 동대문운동장은 그만 장례식장이 된다. 몽양의 운구를 든 체육인들 사이, 손기정이 유독 눈에 띄었다.
오스트리아와 한국, 양국 정상의 회담 장소로 가는 길이다. 자동차 안에서 몽양의 이야기를 꺼낸다. 2021년 6월14일이었다. 문재인 정부 임기 후반으로 가면서 대부분의 비서관이 바뀌었고, 안면도 틀 겸 약간의 긴장을 풀 작정이었다.
몽양의 좌우합작이 성공했다면 오스트리아처럼 우리도 분단을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란 이야기로 시작한다. 손기정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긴 시간 어렵사리 베를린에 도착한 이야기, 아마도 그 비용을 몽양이 마련했을 거라는 추측과 여독 탓에 2시간25분의 자기 기록을 못 냈는데도 금메달을 따낸 건 정말 대단했다는 이야기. 데면데면하던 비서관들이 살짝 귀를 기울인다. 몽양이 엄청난 몸짱의 체육인일 뿐 아니라 당대 지식인들 중에 영어를 제일 잘했다는 이야기로 넘어가자 신남방·신북방비서관이 “진짜예요?” 묻는다. 오늘 정상 간 이중과세방지협정이 있다. 디지털 신산업 분야 협력 논의도 있다. 신경 쓸 일이 많을 터였다. “몰랐어요?” 대수롭지 않은 듯 ‘진짜다’를 강조하며 시인 이상, 소설가 박태원의 이야기를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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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오감도’를 써서 여기저기 가지고 다니면서 발표를 부탁했는데 다 거절당했거든요. 마침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문장강화’로 유명한 이태준이 있었단 말입니다. 이태준이 ‘오감도’를 몽양에게 보여줬는데 몽양이 흔쾌히 싣자 한 거예요. 천재를 알아본 거지요. 독자들로부터 엄청 항의가 있었는데 꿋꿋이 15편까지 견뎌낸 것도 몽양이고,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연재하게 된 것도 몽양의 결정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문학까지 챙겼을까요.”
때마침 회담 장소에 도착해 몽양의 이야기를 마친다. 차에서 내려 옷매무새를 만지는데, 신남방·신북방비서관이 말을 건다. “그동안 한 번도 여운형 선생을 집안 어른이라고 말하지 못했거든요. 오늘 덕분에 많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 맞다, 이름이 여한구다. 몽양의 자손들이 구 자 돌림을 쓴다. 얼굴을 다시 본다. 몽양처럼 이마가 넓다. 대략 집안 어디 구석에 고단함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짐작한다.
얼마 후 여 비서관은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라는 중요 직책으로 간다. 미국 하버드대학 경영학 석사(MBA) 출신에 영어로 무역 관련 책을 쓸 정도로 엄청난 실력자였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된다. 그 영재가 이제까지 선대의 진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것이 우리의 자화상일까. 정부가 바뀌고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선임위원으로 간 그와 가끔 소식을 나눈다. 그날 혹여 몽양을 나쁘게 말했으면 어쨌겠나, 친해지고 나서도 가끔 혼자 몸서리쳤다.

서울 도봉구 현대사인물길. 도봉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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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서 중랑천을 건너가면 바로 도봉구다. 거기 ‘현대사인물길’이 있는데, 가슴이 벌렁벌렁할 정도로 가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그 길을 달린다. 도봉역에서 조금만 가면 김수영 시인의 옛집이 있다. 요즘은 도봉산 오르는 길목에 김근태기념도서관이 들어서 도봉산역부터 길을 잡기도 한다. 왼쪽으로 달리다보면 계훈제 선생 옛집, 간송 전형필 선생 가옥이 이어진다. 이제부터 점입가경이다. 전태일 열사 옛 집터, 함석헌 선생 가옥을 지나 가인 김병로, 위당 정인보, 고하 송진우, 벽초 홍명희 선생의 옛 집터를 지난다.
김근태 선생만 유일하게 실제 삶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선함으로 고문을 버텨내고, 따뜻함으로 시대의 도덕성을 세웠다. 낡고 허술한 3층 건물이 자리잡은 위당 선생의 집터 앞에서는 늘 감회에 젖는다. 민영규 선생의 글 때문이다. “서울 기차 정거장 플래트폼에서 (허름한 옷차림의 노인) 난곡을 보자 위당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는 광경을 보았다.”(‘위당 정인보 선생의 행장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 나는 이 문장이 결코 스승과 제자 간의 낡은 예의범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잃어버린 것들, 결과보다 과정에 충실했던 옛 분들의 단단한 심지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저 무엇이 어른들과 우리 사이의 고결한 끈을 끊어버렸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결과에 대한 집착일까. 성급함일까. 앞선 분들의 삶, 앞선 가치들 없이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순 없다. 성패를 떠난, 지극한 서사다.

도봉산 초입, 김근태기념도서관. 사진 신동호

서울 도봉구 정인보 선생 옛 집터 표지판. 사진 신동호
달리기는 다리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상체의 움직임을 줄이고, 팔을 잘 흔들어야 장거리에서 에너지 소모를 줄일 수 있다. 먹는 것도 중요하고, 수분 섭취도 적절히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달리기에 맞게 몸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산소가 몸속으로 잘 흡수돼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천천히 달리면서 들숨과 날숨을 조절하고 숨이 트이는 경험에 도달해야 한다. 처음부터 빠르게 달리면 몸이 적응하지 못한다. 시간이 필요하다. 반복을 견디고, 어제의 달리기가 쌓여야지만 오늘의 달리기를 변화시킬 수 있다.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겼던 기억만큼은 잊으면 안 된다. 한계에 다다랐을 때, 그 기억이 자신을 격려한다. 장거리달리기 역시 한 개인의 지극한 서사다.
역사의 깊이만큼 오스트리아는 많은 인물을 냈다. 익숙한 이름만으로,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 하이에크와 슘페더, 멘델과 슈뢰딩거, 하이든과 슈베르트 또 곰브리치. 일일이 나열하기 벅차지만 모차르트를 뺄 수 없다. 그의 ‘피가로의 결혼’이 공연될 때 극장은 서민들의 휘파람 소리로 가득했다. 귀족들의 극장이 서민들의 극장으로, 몇 사람만의 비극이 다수가 공감하는 희극으로 전환된 변곡점은 모차르트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시대정신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를 지울 수 없다. 궁정악장으로 오직 귀족들을 위해 음악적 재능을 쏟았던 아버지가 있었기에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배반이 가능했다. 변함없이 흐르는 도나우강의 잔물결, 상류와 하류를 이어주는 심연이 있었기에 파격이 가능했다. 변화란 일상의 축적, 지루한 반복의 과정에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

도나우강의 잔물결. 사진 신동호
우리는 너무 빠르게 달려왔다. 귀중한 것을 흘리면서도 저 앞에 도달하면 모두 상쇄할 수 있다고 여겨왔다. 대충 묻어두면서, 대충 이해할 것이라 지레짐작하면서, 서로 생각이 이토록 멀어질 것이라고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이제 좀 천천히 갈 때가 됐다. 절차에 맞게, 공정한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면서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갈 때가 됐다. 다시 멀리 달릴 수 있는 몸을 만들고, 좋은 성취와 좋은 기억을 되살려(그러려면 반드시 역지사지해야 한다)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나는 집안 어른을 새롭게 만난 여한구 비서관이 비로소 어제를 간직하게 됐다고 여긴다. 능력 있는 전문관료에서 과거와 미래를 이을 수 있는 사람, 변화에 능동적인 선구자로 재탄생됐으리라 믿는다. 그렇게만 된다면 좌우합작, 국민통합도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글·사진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58번의 순방으로 40개 나라를 방문했다. 신동호 시인은 연설비서관으로 참모 가운데 유일하게 모든 순방 일정을 보좌했고, 새벽 시간을 활용해 낯선 나라를 달렸다. 그때 보고 느낀 감정은 문 전 대통령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떠나며’ 시리즈에 고스란히 담기기도 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시인의 달리기에 대한 생각과 함께 묵혀놓았던 순방지의 새벽 이야기들을 4주마다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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