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장수의 산길을 달린다. 팔공산, 신무산을 지나는 38㎞의 낯선 길이다. 동쪽 아침이 서북쪽 안개에 산 아래 마을 길을 알려준다. 밤사이 경상남도 함양에서 육십령 고개를 넘어 읍내까지 왔다가 길을 잃은 안개들이다. 구름재를 넘으면 진안, 말치고개를 넘으면 임실이다. 수분재 곁에는 뜬봉샘이 있다. 금강의 발원천이다. 북쪽 찬바람을 맞아 몸집을 부풀리려면 큰싸리재를 넘어 무주 쪽으로 가야 했다. 풍경에 취해 능선에 머무르는 사이, 각양각색의 숨소리가 안개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가 저마다의 발걸음 소리를 앞세워 빠져나간다.
산길을 달리다보면, 어느새 혼자일 때가 있다. 로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야릇한 순간이다. 마치 동굴 안에서 빛 한 줄기를 쫓아 달리는 느낌을 준다. 선두 주자의 외로운 질주가 이런 것일까, 잠시의 몽상이 불끈 힘을 내게 한다. 신갈나무, 노린재나무, 억새들, 하나하나 다른 것들이 비비며 키재기를 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흙길 중간, 돌부리가 발끝을 낚아채려 잠복해 있다. 속도를 올리면서 돌부리와 지독한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이 순간이다. 꼭 혼자는 아니었다. 둘러보면 동행도 있다. ‘걷고 싶은 생각’, 아마도 첫 언덕을 오를 때부터 쫓아왔던 것 같다. 결승점까지, 끝내 함께해줄 것이다. 고맙다, ‘걷고 싶은 생각’.
아름다운 대회, ‘장수 트레일 레이스’의 소문을 듣는다. 장수에 1천m 넘는 봉우리가 가득이다. 이웃한 무주 덕유산, 진안 마이산의 명성 앞에 겸손할 뿐 소백산맥의 진면목을 여기서 본다. 진경이 과분하다. 나에게 장수는 ‘죽음의 한 연구’의 작가 박상륭 선생의 꿈틀꿈틀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는 문장이다. 그곳에서 채워진 유년의 언어를 질투한다. 대학 시절 일군을 열광시킨 소설 ‘단’(丹)이 있었다. 전설인 줄만 알았던 선(仙)의 세계를 도시로 가져와 정신이 깨어나라고 자극했다. 작가 김정빈의 고향이 장수다. 그의 동생 길빈이 과 동기여서 형의 이야기를 듣는다. 소설의 배경이 인적 드문 장수 어디임을 짐작한다. 깊고 신비로운 장수. 진작부터 가보고 싶었는데, 소문을 덜컥 붙잡고 대회에 등록한다.
굵은 산들, 듬직한 경치만큼 사람들이 묵직하다. 마을들이 함께 준비하고 함께 달린다. 자연을 기꺼이 내주고, 자연이 기꺼이 호응한다. 장수는 전라도 전체에서 가장 깊은 산골, 인구도 가장 적다. 지역을 살리기 위한 안간힘, 고군분투, 러너들이 그 정성에 어우러진다. 낡은 여인숙이 세련된 도시 젊은이를 만난다. 쇠락한 음식점이 잠시 활황이다. 나도 기꺼이 장수의 일부가 된다. 내가 장수를 구경하고, 장수는 나를 구경한다. 말이 없어도 된다.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소통이다. 이 대회는 외지인들에게 장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장수에게 그들을 보여주는 대회일까. 그렇게 장수가 시끌벅적해지고 있다.
2019년 4월 문재인 대통령 중앙아시아 순방길, 투르크메니스탄 아시가바트가 떠오른다. 아시가바트는 커튼의 도시다. 모든 창문을 가린 커튼이 사막의 빛과 갈 길 사이에 장막을 드리운다. 새벽길 시내 한복판 5㎞를 달리면서 한 사람도 볼 수 없다. 모두가 나와서 외지인을 반기고, 외지인 모두가 그곳의 일부분이 되는 ‘장수 트레일 레이스’와는 정반대 모습이다. 초청한 정부 인사들 말고는 도시의 누구에게도 방문한 우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괴기한 동상만 금맥기를 뒤집어쓴 채 도시 한쪽에서 외롭다. 투르크메니스탄은 명마 아할테케로 유명하다. 한혈마(汗血馬), 그러나 말은 붉은 땀을 흘리지 않는다. 독재자만 홀로 말에 올라 홀로 번쩍인다. 사진을 찍다가 잡혀갔다는 얘길 듣는다. 겁먹는다. 주머니에서 국빈 방문증을 꺼내 목에 건다. 두리번두리번, 몰래 사진 한 장을 찍고 마음속에는 동영상을 담는다. 새벽녘, 감시의 눈이 잠시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기를 바라본다.
아시가바트는 백색의 도시, 새것처럼 좀 어색한 도시다. 아시가바트를 달리며 슬픈 코미디를 본다. 초대 대통령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는 도시를 하얗게 칠한다. 니야조프가 죽고 대통령이 된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함메도프는 하얀색 차만 다니게 한다. 차가 지저분해지면 반역이다. 니야조프는 건강에 문제가 생기자 담배를 금지한다. 아시가바트에서는 흡연만이 혁명의 징후다. 니야조프가 잘한 건 딱 하나, 세습을 원했던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귀국을 거부한 아들을 키운 것이다. 베르디무함메도프는 집권하자 니야조프의 동상을 철거한다. 변화를 기대하는 박수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그 자리에 자신의 황금 동상을 세우며 웃음거리를 선사한다. 대통령직은 아들 세르다르 베르디무함메도프에게 세습한다. 평양의 데자뷔다. 국민은 행복할까, 궁금하다.
사막은 천연가스로 독재를 지탱하고, 자원은 국민을 영원한 침묵으로 잠재운다. 견고하게 밀봉된 한숨만 수출한다. 양국 정상은 대규모 가스화학단지 키얀리의 협력을 확대하자고 약속한다. 가스직업훈련원을 세우기로 한다. 양국 정부가 바뀌고 또 같은 약속을 반복한다. 외교는 하얀 대통령궁 안에서 하얀 거짓말로 은밀히 주고받을 뿐, 국민은 서로를 볼 수 없다. 아시가바트는 고대 파르티아의 수도였고 비단길 중개무역으로 번영했던 곳이다. 아시아와 서구가 처음으로 마주쳤다. 아직 로마와 몽골 침입의 악몽을 꾸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카라반은 여전히 사막을 헤매고 있다. 오아시스의 나라 투르크메니스탄은 모래바람 뒤에 숨어 있다. 아시가바트에서 호라즘의 노마디즘은 여름잠을 잔다.
저기 체육관이 보인다. 30분을 달려 겨우 청년 둘과 마주친다. 운동복을 입었다. 함부로 폄훼할 수 없는 촌스러움, 짧게 깎은 머리에서 아직 길들지 않은 희망을 본다. 내가 그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면, 그들이 나를 구경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용감하게 달린다. 텅 빈 신호등을 철저히 지켜가며 모자를 똑바로 고쳐 쓴다. 돌아오는 길, 버스정류장에서 아주머니 두 분과 눈인사를 나눈다. 투르크메니스탄이 자랑하는 카펫처럼 오묘한 문양이 새겨진 원피스를 입었다. 마치 순종적인 것처럼, 전통으로 몸가짐을 위장한다. 나도 긴장감을 자유로움으로 한껏 위장한다.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리라, 그래도 기억에 남으리라. 보라, 길은 마음껏 달리라고 있는 것이다.
평양을 생각한다. 어찌 인간 개개인의 뜨거운 열정이 한 인간에게 다 바쳐질 수 있을까. 투르크메니스탄의 독재자는 1년에 기껏 40~50권의 자국어로 쓰인 책의 출간을 허용한다. 인터넷을 막는다. 5G 상용화를 위해 체결한 ‘정보통신기술 업무협약(ICT MOU)’은 어디까지 진척되었을까. 감출 것이 많은데 가능하기나 할까. 평안남도 평성에서 대학을 나온 탈북자 아우에게 묻는다. “외국 작가의 책을 읽어본 일이 있어?” 답한다. “‘안나 카레니나’인가….” 적어도 자기가 아는 한 외국 작가는 톨스토이뿐이다. 그것도 소련 사회주의가 무너지자 깡그리 걷어간다. 영혼의 일치단결, 가능하지 않은 미래를 향한 오늘의 족쇄, ‘견딜 수 없는 존재’의 다양함, 혁명은 오직 진정한 혁명을 두려워하기에 이를 예방하기 위해 사용하는 레토릭이다. 그렇다고 뒷골목 어두운 건물 안에 몰아넣은 일상이 오래도록 감춰질 수는 없다.
평양에서는 애초에 새벽길에 혼자 나갈 수조차 없다. 휴대전화를 압수하고, 카메라를 검열한다. 감출 것이 많아서 그런 줄 알았지만, 아닐 것이다. 아시가바트에서는 커튼을 치고, 평양에서는 정해진 곳만 가도록 보위부 요원이 따라다닌다. 애초에 외지인을 구경거리로 만들 생각이 없다. 1989년 임수경의 방문으로 평양이 들썩였다. 단발머리의 한국 여대생을 구경하면서 북한 청년들 마음에 이상향이 자란다. 탈북 이유가 구체화되고, 잠 못 드는 밤이 거듭된다. 서로를 바라보는 것, 구경만으로 소통이 이뤄졌던 것이다. 만남과 소통이 번번이 변화를 촉구했다는 것을 독재자들이 모를 리 없다.
적대적 두 국가로 완전히 갈라섰다고 서로가 마주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접경 지역에서, 변방에서, 다시 소규모로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듯 시작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스쳐 지나갈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항구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객실, 운동장의 함성 안에서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안부나 나누는 대화가 그 단초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근다면, 그만큼의 강도로 문을 두드려야 한다. 그들이 진정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가서 그들이 우리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소리라도, 혹은 냄새라도 나눠야 한다.
남는 힘을 쥐어짜 38㎞ 결승점에 들어온다. 5시간 운전해서 혼자 온 탓에 반겨주는 지인은 없다. 그래도 늦은 오후의 산그늘, 마을 사람들의 응원 소리, 먼저 도착한 러너들의 느긋한 표정이 마중 나와 있다. 산길만 9시간을 달렸으니 수많은 고개를 넘어다니던 장수 사람처럼 꽤나 장수스럽게 장수를 만났다. 러너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통해 장수 역시 변해갈 것이 분명하다. 투르크메니스탄과 북한이 그렇게 외지인들을 정직하게 만나고, 그들을 통해 변화의 동력을 만들어내길 기대해본다.
완주패를 받고 양말을 벗어보니 왼발 엄지발톱이 검게 멍들어 있다. 빠질 듯 흔들린다. 가파른 내리막길의 기억이 허벅지를 땅긴다. 주춤대며 부여잡았던 자작나무 흰 살이 떠올라 손바닥을 펴본다. 아침 햇살을 촘촘히 잘라 물결 위에 던져주던 바이칼 호수의 자작나무 숲, 하루 종일 기찻길과 나란히 이어지던 장엄한 숲이 장수에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발톱이 새로 자라려면 적어도 6개월은 걸릴 것이다. 그 기간만큼은 기억이 마음에만 남지 않고, 발톱에도 남아 있어줄 것이다. 자작나무 몇 그루쯤 뒤뚱거리던 내 뒷모습을 잊지 않아줄 것이다.
글·사진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연재 소개: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58번의 순방으로 40개 나라를 방문했다. 신동호 시인은 연설비서관으로 참모 가운데 유일하게 모든 순방 일정을 보좌했고, 새벽 시간을 활용해 낯선 나라를 달렸다. 그때 보고 느낀 감정은 문 전 대통령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떠나며’ 시리즈에 고스란히 담기기도 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시인의 달리기에 대한 생각과 함께 묵혀놓았던 순방지의 새벽 이야기들을 4주마다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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