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이런 생각을 떠올린다. 귀신 얘기를 지어내는 사람은 자신이 지어낸 얘기가 무섭지 않을까? 한데 정보라 작가는 아닌 모양이다. 글을 쓰다 막히면, 아무리 해도 글이 안 나올 때 최후의 방책이 ‘귀신 얘기를 쓰는 일’이란다. 귀신 얘기는 듣고 읽고 쓰는 것 다 좋고, 어디서 귀신이 나오면 제일 무서울지 궁리하다보면 어떻게든 글이 풀린다고. 마치 이야기 짓는 즐거움의 요체에 귀신 얘기가 있다는 듯하다.
<한밤의 시간표>는 정 작가에게 2022년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는 행운을 안긴 <저주토끼> 이후 처음 펴낸 신작 소설집이다. 작가가 신나서 “일거리가 아닌, 놀이동산”에 간 것처럼 써낸 ‘괴담’ 일곱 편이 수록됐다. 모두 ‘귀신 들린 물건들을 모아놓은’ 이상한 연구소를 배경으로 각각의 소설이 서로 연결된 일종의 옴니버스다. ‘손수건’에서 등장한 무능한 작은아들의 영혼을 잠식한 손수건의 사연이, 먼 옛날 멸망한 나라를 배경으로 한 ‘푸른 새’에서 설명되는 식이다.
정 작가는 본인의 여러 책에서 필자 소개를 ‘불의하고 폭력적인 세상에 맞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사랑한다’고 쓴다. 이 책에서도 그렇다. 책의 화자는 연구소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여성이다. 당연히 연구직일 거라는 편견이 작용하지만, 그저 한밤중 문단속하는 게 일인 야간경비원이다. 화자의 ‘선배’는 시각장애인이며, 이 선배의 또 다른 선배는 낮에 식당에서 밤엔 연구소에서 일하며 남편 없이 혼자 힘으로 아이 셋을 키웠다. 그 선배가 그만두고 새로 들어온 이는 성소수자다. 성소수자 야간경비원은 ‘들어오시면 안 된다’는 ‘여기’에 들어갔다가 환각을 경험하는데, 살아야겠다는 의지로 환각과 맞선다. 소수자에게 익숙한, “세상의 폭력과 학대를 견디고 자신을 부정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의지 말이다.
본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의 상징(박혜진 문학평론가의 ‘작품 해설’)인 연구소는 소설에서 ‘귀신 들린 물건들’을 위한 공간이자, 이 연구소에서 한밤의 시간을 책임지는 소수자들을 위한 공간이 된다. 연구소는 이 소수자들이 미약하나마 사회활동을 하며 경제적 생활을 영위해가는 수단이 된다. 특히 혼자 힘으로 아이 셋을 키운 선배 같은, 여성을 배려한다. 이 사회엔 아직 “가족 내 가장 만만한 구성원의 피와 골수를 빨아먹어야만 가족이라는 형태가 유지”되는 가부장제가 도사리고, 그 만만한 구성원이 대부분 여성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에 취한 남성은 그저 “아내보다도,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보다도 자기 자신이,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이 가장 중요”한 이기적이고 무능한 존재들로 그려진다.
‘손수건’의 주인공 ‘작은아들’이 특히 그렇다. 어머니가 숨지며 남긴 손수건이 사라지자 작은아들은 손수건에 영혼을 잠식당하고 한밤중에 깨어나 맨발로 동네를 돌며 쓰레기통을 뒤진다. 부랑자로 전락한 작은아들을 어찌할지를 두고 남은 자식들이 의논하는데, “거기서부터 또 다른, 새롭고도 오래된 가족 드라마가 시작되었고 그것은 전혀 무섭지 않지만 또 어찌 보면 가장 무서운 이야기”가 된다. 결국 지어낸 귀신 얘기보다 현실이 더 무섭다는, 익숙한 귀결이다. 정 작가가 귀신 얘기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도 귀신보다 현실이 더 무섭기 때문일까.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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