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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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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성, 죽은 자에게 해줄 유일한 것

재난 이후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이유 <유류품 이야기>
등록 2023-01-04 10:13 수정 2023-01-05 01:10

가까운 사람을 예상치 않게 잃고 나면 삶이 끝없이 흔들린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다면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이 쉽게 정리될 수 없다. 사람의 육체가 사라지더라도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인 ‘모호한 상실’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참사로 많은 사람이 숨졌지만 죽음이 끝까지 규명되지 못할 때 일어난다. 떠난 이를 향한 감정의 여진이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평범한 우리 삶까지 뿌리째 흔들기도 한다.

대규모 참사 현장에서 죽음을 마주하는 일을 해온 재난 수습 전문가가 책을 냈다. 현재 재난 수습 회사 대표로 일하는 로버트 젠슨은 실종자의 주검을 수습하고 신원을 확인해 그 사람의 소유물을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일을 해왔다. 그가 마주한 현장은 9·11테러, 허리케인 카트리나, 2004년 아시아 쓰나미, 2010년 아이티 대지진, 오클라호마 폭파사건 등이다. <유류품 이야기>(김성훈 옮김, 한빛비즈 펴냄)에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재난을 마주하며 그간 겪었던 일이 정리돼 있다.

책에는 삶과 죽음, 죽음을 대처하는 우리의 바람직한 태도 등에 대한 지은이의 생각이 담겨 있다. 지은이는 “대량 사망 사건에 직접 영향을 받은 생존자는 고개를 돌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시스템이 이들을 어떻게 돌보느냐에 따라 이 시기가 얼마나 길고 힘들게 이어질지가 달라진다”고 밝혔다.

존엄성이야말로 죽은 자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 오클라호마시티 폭탄테러 사건을 수습하며 지은이가 든 생각이다. 그는 당시 전사자 예우 담당국 주요부대인 육군 제54 병참중대 지휘관으로 생존자 수색에 참여했다. 주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잔해에 끼여 제복이 드러난 해병의 주검을 반으로 잘라 빼내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명령을 거부했다. 대신 주검을 오롯이 빼낼 수 있을 때까지 보이지 않게 덮어뒀다. 온전한 주검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때, 그제야 가족이 새로운 현실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서다.

지은이는 내전을 겪은 발칸반도에 1995년 파병되기도 했다. “우리 지도자들은 죽은 사람을 처리하지 않고는, 유족과 난민이 그들이 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답을 찾도록 돕지 않고는 그저 슬픔을 뒤로 미루고 내전으로 갈가리 찢긴 나라의 궁극적 회복을 뒤로 미룰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은 것 같다.” 당시 주검의 처리를 소홀히 하는 정부에 던진 지은이의 메시지는 각종 참사와 재난에 노출된 한국 사회에도 유효한 듯 보인다.

이정규 기자 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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