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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정의’를 독식하려 하느냐

자신을 왕위에 올린 노론을 향해 칼을 휘두른 영조, 여전히 ‘우리 편만이 정의’라는 2022년의 정치
등록 2022-10-22 16:10 수정 2022-10-23 10:54
51살 때 영조의 모습. 영조는 노론을 내쫓으며 ‘당파를 옹호하고 남을 해치려는 뜻으로 조정에 나온다면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고 밝혔다. 어진 박물관 제공

51살 때 영조의 모습. 영조는 노론을 내쫓으며 ‘당파를 옹호하고 남을 해치려는 뜻으로 조정에 나온다면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고 밝혔다. 어진 박물관 제공

‘역적이 선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1724년 10월16일, 선왕 경종(景宗)의 뒤를 이어 창덕궁에서 즉위하는 영조(英祖)를 바라보는 소론계 강경파 신료들은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의 세계관에서 경종의 재위 기간 노론과 영조의 언행은 역모였다.

왕위 계승과 역모 등으로 대립한 노론·소론

경종 1년(1721년). 노론은 소론의 지원으로 왕위에 오른 34살의 경종에게 이복동생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세제로 삼으라고 압박해 관철했다. 더 나아가 왕세제가 왕 대신 정사를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론은 분노했고 다음해 노론의 역모를 적발했다며 ‘삼수의 옥’을 일으켰다. 다수 노론계 신하에다 왕세제의 처조카인 서덕수도 역모죄로 숙청됐다. 당연히 소론계 강경파는 서덕수의 윗선을 밝혀야 한다고 했지만 경종이 허락하지 않아 유야무야됐다. 왕세제를 의심한 준소는 경종의 사망에도 연잉군을 연관시켰다. 노론의 처벌 문제로 소론은 크게 완소와 준소로 나뉘었다. 완소는 온건파, 준소는 강경파였다

1724년 10월. 소화불량으로 자리에 누운 경종에게 누군가가 게장과 생감을 저녁 식사로 올렸고 이를 먹은 경종은 급격하게 증상이 악화해 숨졌다. 식사를 올린 유력한 용의자가 왕세제였다. 당시 기록은 의사들이 게장과 생감을 같이 먹는 건 매우 꺼리는 행위라고 말했다고 쓰였다.

영조와 노론의 눈에 준소는 ‘역적’이었다. ‘삼수의 옥’에서 준소가 내민 증거는 신빙성이 낮았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경종은 젊었지만 몸이 허약해 자식을 낳을 가망이 없어 보였다. 숙종의 아들은 경종과 영조 단둘뿐이었다. 왕실의 혈통을 중요시한다면 영조 말고는 마땅한 후계자가 없었다. 완소가 영조를 보호한 이유였다. 준소는 그런 영조를 죽이려 들었다. 경종의 직접적 사인이 ‘게장과 생감’ 때문이라는 명확한 증거도 없었다. 노론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민 대가로 소론에 심하게 피해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영조가 왕위에 올랐으니 보상받아야 했다. 영조도 처음에는 준소를 숙청했고 ‘삼수의 옥’을 백지화했다. 영조와 노론이 갈라진 지점은 여기서부터였다. 영조는 더 이상을 원하지 않았다. 영조는 자신이 한 정파의 수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소론이 모두 죽어야 정의’라고 생각했던 노론의 세계관과는 차이가 있었다. 노론은 그런 영조를 이해하지 않았다. 노론의 지원이 없으면 영조가 왕 노릇을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왕을 재차 압박했다.

각자의 세계관을 죽여야 내가 사는 전투

결국 영조는 칼을 빼든다. 노론을 향해. 영조 3년(1727년) 7월, 영조는 완소 인사들로 조정을 채우고 노론을 내쫓았다. 조선의 마지막 환국인 정미환국이다. 이 결정은 보답받았다. 준소는 ‘게장과 생감’을 고리 삼아 무장봉기를 준비 중이었는데, 그 직전 완소가 집권하면서 명분을 잃어버렸다. 결국 비밀이 새나가면서 준소의 봉기는 실패로 끝난다. 영조는 진압 뒤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한 뒤에도 감히 당파를 옹호하고 남을 해치려는 뜻으로 조정에 나온다면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 ‘정의의 독식’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3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편만이 정의’라는 신념은 ‘친일’과 ‘종북’이라는 프레임으로 여전히 맹위를 떨친다. ‘친일’과 ‘종북’은 한국 정치사에서 상대를 정치적 반대파가 아닌 적으로 보게끔 했다. 30년 이상 서로를 공존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배척하기 위해 사용했던 단어들이 아직도 살아 숨 쉰다. 2022년 10월에도 말이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10월16일 페이스북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이 김일성주의를 추종하는 사람이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이 김문수 한 사람뿐인가” “이 엄중한 안보 상황에서 왜 북한에는 (말) 한마디 못하고, 북핵 위협 규탄 결의안에도 동참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따졌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0월7일 윤석열 정부를 겨냥해 “일본을 끌어들여서 한·미·일 합동군사훈련을 하면 일본 자위대를 정식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게 일본의 이익을 위한, 대한민국 국방이 대한민국의 군사안보를 지키는 게 아니라 일본의 군사이익을 지켜주는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극단적 친일 행위”라고 했다.

이건 각자의 세계관을 인정한 채로 다투는 정치가 아니다. 각자의 세계관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전투다. 선거를 앞둔 ‘정치적 전투’ 시점이라면 그나마 양해될 지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다.

여야 주장 모두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재명 대표는 한·미·일 합동군사훈련을 독도 인근에서 한다고 주장했는데 김승겸 합참의장은 “독도와는 185㎞, 일본 본토와는 120㎞ 떨어져 있어 오히려 일본 본토와 가깝다”고 대답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일본 자위대가 독도를 겨냥하는 것을 묵인할 한국 정부가 어디 있는가. 여당이 문재인 정부에 ‘종북’이라는 의심표를 붙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미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2013년 “남북 간 체제 경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을 북한에 바치려는 사람은 정신병원부터 가야 한다.

300년 전에는 숙청 뒤 ‘환국’이 찾아왔는데…

정치란 각자의 세계관을 남에게 이해시키는 행위다. 이해를 위해 여러 행동이 수반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설득이 가장 큰 수단이다. 자신의 세계관만이 옳으며 다른 세계관은 말살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도 아니고 이해도 아니다. 그저 아집이다. 그 속에는 우리만이 옳으니 내부적으로 딴소리하지 말라는 윽박지름도 숨어 있다.

300년 전, 자신의 세계관만이 옳고 상대는 역적이라고 주장했던 정치세력은 왕으로부터 숙청당했고 ‘환국’이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므로 지금의 ‘왕’은 곧 국민이다. 지금의 국민이 한 정치세력에 정의를 독점시킬 것 같은가. 불과 6개월 전 대통령선거에서 우리 국민은 이미 말했다. ‘정의를 독식하지 말라’고.

이도형 <세계일보> 기자

*역사와 정치 평행이론: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언론사 정치부에서 국회와 청와대 등을 8년간 출입한 이도형 기자가 역사 속에서 현실 정치의 교훈을 찾아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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